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청전쟁 기간의 제국 주차부대의 행동 日淸戰役間ニ於ヶル帝國駐箚部隊ノ行動
일러두기

제3장 일청전쟁 기간의 제국 주차(駐箚)부대의 행동 1893년 3월 충청북도 보은(報恩) 사람인 최제우(崔濟愚)는 조정의 간신을 배척하고 외국인을 물리친다는 명의로 도당을 소집(嘯集)하여 동학당[동학당은 철종 말기 경주의 최복술(崔福述)이 주장해 당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이라고 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제우는 법에 따라 처단되었지만 잔당 세력은 얕볼 수 없었으므로 5월 조선 조정은 선무사(宣撫使)를 파견해 그 진압에 힘썼다. 비도들은 한때 해산했지만 조선 반도 정계의 풍운은 점차 암담해졌다. 원세개와 결탁한 민파(閔派)의 전횡과 방자함은 날로 더욱 심해졌고 그해의 흉작은 민심을 더욱 동요시켰다. 1894년 5월 민족(閔族) 일파의 사주를 받은 자객은 이전에 제국으로 망명한 박영효, 김옥균 등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마침내 김옥균을 청국 상해로 꾀어내 그를 살해하고 그 유해를 경성으로 옮겨 극형에 처했다. 같은 달 전라북도 고부의 백성 전봉준(全琫準)은 동학당을 외치며 난을 일으켰다. 지방의 무뢰한 무리가 변화를 바라며 이에 호응해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여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물(官物)을 약탈하고 양민을 침해하였다. 이에 정부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했으나 용이하게 진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도의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삼남 일대의 지역은 동학당이 발호하는 곳이 되었다. 크게 일어나 장차 경성을 공격하려는 상황이므로 조정 신하가 논의하여 청국 정부에 원병을 청했다. 1894년 5월 동학당이 삼남지방에서 봉기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진정할 수 없어서 청국에 구원을 청했다. 청국은 제국과 체결한 천진(天津)조약을 무시하고 섭지초(葉志超)를 장수로 삼은 4천여 명의 육군과 제원(濟遠), 평원(平遠), 양위(揚威), 치원(致遠), 조강(操江)의 5개 함선을 파견하였다. 6월 5일 육군을 아산만에 상륙시키며 제국 정부에 지조(知照)하여 말하기를 “속방인 조선에 내란이 있어 독력으로 이를 토멸할 수 없어 우리 정부에 원병을 청하였으므로 출병한다.”라고 하였다. 세 척의 함선이 출발하여 인천에 들어가니 제국 군함 7척이 이미 월미도 부근에 늘어서 있었다. 다음 날인 10일 해군 소좌 무카이야마 신키치(向山愼吉)가 육전대 약 300명을 이끌고 오토리(大鳥) 공사를 호위해 경성으로 들어갔다. 13일 육군 보병 소좌 이치노헤 효에(一戶兵衛)는 제5사단 보병 제11연대 제1대대(공병 1개 소대 부속)를 이끌고 입경하여 해군 육전대와 교대했다. 주력을 경성에 주둔하고 일부를 성현(星峴) 및 마포에 파견하여 경성과 인천 간의 육로 및 한강 수로의 호위에 임하였다. 16일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혼성여단[보병 제11연대, 제21연대, 기병 제5대대 제1중대, 야전포병 제5연대 제3대대, 공병 제5대대 제1중대, 치중(輜重) 및 병참부대 약간]의 대부분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해 그곳 부근의 경비에 임하고 보병 제21연대 제8중대[중대장은 대위 하라노 겐(原野兼)]는 17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곳의 수비 근무에 임했다. 24일 오시마 여단장은 시국이 더욱 분규하여 형세가 날로 불안해지고 또 청군이 연이어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인천 주둔 부대를 용산으로 이전하고 혼성여단 나머지 부대의 상륙을 기다려 차례로 경성 부근에 집중 시켰다. 원래 제국 정부는 시국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하여 여러 차례 청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오토리 공사는 입경 후 원세개 및 조선 조정의 당사자와 수차례 회견하고 상의한 바 있지만, 시국의 분규는 마침내 국교의 단절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7월 18일 오토리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다음 4개조를 조선 정부에 요구하고 22일을 회답 기한으로 삼았다. 1. 제국 정부는 경부 간에 군용 전선을 가설한다. 2. 조선 정부는 제물포조약에 따라 제국 군대를 위해 병영을 건설한다. 3. 아산에 있는 청군은 속히 철수하게 한다. 4. 청한(淸韓) 사이의 조약 가운데 조선의 독립에 저촉되는 것은 일체 폐기한다. 7월 22일 원세개는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함을 간파하고 몰래 인천으로 가 군함 평원에 탑승해 귀국했다. 23일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의 답변이 없으므로 하시모토(橋本), 모리(森) 두 명의 소좌가 이끄는 보병 2개 대대를 따라 경복궁으로 향했다. 문을 지키는 조선군 약 5백 명이 요격하며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으나 우리 군은 이를 물리치고 돌진하여 궁정을 수호했다. 오토리 공사가 궁에 들어가자 민씨 일족은 모두 도망치고 대원군은 개혁파에 옹립되어 운현궁으로부터 입궐하여 김굉집(金宏集)으로 하여금 신정부를 조직하게 하였다. 오토리 공사와 내정개혁을 협의하여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아산 부근의 청군을 쫓아낼 것을 청하였다. 오토리 공사는 제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오시마 혼성여단을 파견하였다. 오시마 여단장은 다음 각 부대를 각지의 수비군으로 머물게 하고 주력(전투원 보병 약 3천 명, 기병 47기, 산포 8문)을 이끌고 바로 남하하였다. 부산수비대 보병 제21연대 제8중대 인천병참수비대 보병 제21연대 제11중대, 기병 7기 용산병참수비대 보병 제11연대 제3중대, 기병 5기 경성수비대 보병 제11연대 제1대대(제3중대 결), 기병 5기 임진진독립지대 장 보병 소좌 야마구치 게이조(山口圭藏) 보병 제21연대 제2대대(제7, 제8중대 결) 및 동 제2중대 기병 1소대, 포병 제5중대(1소대 결), 공병 1소대 같은 날 우리 함대[쓰보이(坪井) 소장이 지휘하는 요시노(吉野), 아키쓰시마(秋津洲), 나니와(浪速)의 3함선]는 청국 함대와 풍도(豐島) 앞바다에서 싸워 군함 광을(廣乙), 운송선 고승(高陞)호(아산으로 수송하는 육군 약 1,200명, 포 14문을 탑재)를 격침하고 군함 조강(操江)호를 포획했다. 오시마 혼성여단은 이미 출발해 과천, 수원, 진위를 거쳐 남진하여 29일 성환 부근에서 청국 장수 섭사성(聶士成)의 군대 약 3천 명[총장(總將) 섭지초는 수하의 병사 약 천 명을 이끌고 천안에 있어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도망쳤다]을 공격해 그 가운데 5백 명을 사상(死傷)시켰다. 적병은 두려워하며 서남쪽으로 도주하였으므로 8월 5일 경성으로 귀환해 바로 북방에 대한 작전 준비를 하였다. 8월 1일 선전(宣戰)의 조칙(詔勅)이 발포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청국은 이미 대병력(약 1만 5천 명)을 평양으로 진군했고 또 성환 부근에서 패전한 병력 약 3천 명은 강원도를 거쳐 이에 합류한다는 정보가 도착했다. 여기에서 제5사단장 육군 중장 자작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는 사단 잔여 부대의 절반(일부는 원산으로 파견되어 그곳으로부터 경성으로 향하게 함)을 이끌고 8월 6일 부산에 상륙해 대구, 문경, 충주를 거쳐 8월 19일 경성으로 들어가[다른 절반의 부대는 다쓰미(立見) 소장이 지휘하여 해로로 인천으로 들어가 8월 21일까지 상륙했다] 오시마 혼성여단의 편제를 풀고 다음 각 부대를 각지의 수비대로 머물게 하고 9월 1일 모든 준비를 갖추어 평양 공격을 위해 북진하였다. 경성수비대 장 보병 소좌 야스미쓰 신아이(安滿伸愛) 보병 제22연대 제2대대(제5중대 결) 인천병참수비대 보병 제22연대 제5중대 용산병참수비대 보병 제12연대 제12중대 낙동전선수비대 보병 제21연대 제8중대 노즈 제5사단장은 오시마 소장의 혼성 제9여단[보병 제11연대, 동 제21연대(제2대대 결), 기병 1중대(1분대 결), 포병 1대대, 공병 1중대, 치중부대 약간]으로 하여금 경의가도를 전진해 평양의 정면을 맡도록 하고, 다쓰미 소장의 삭령(朔寧)지대[보병 제12연대 제1대대(1중대 결), 보병 제21연대 제2대대(1중대 결), 기병 1소대와 1분대, 포병 1중대]로 하여금 신계(新溪), 수안(遂安), 삼등(三登), 강동(江東)을 거쳐 평양의 동면으로, 또 사토(佐藤) 대좌의 원산지대[제3사단 보병 제18연대, 기병 1소대, 포병 1대대, 공병 제3대대(1중대 결), 위생대 절반]로 하여금 양덕(陽德), 성천(成川), 순안(順安)을 거쳐 평양의 동북면을 공격하게 하고, 사단 주력은 경의가도에 있는 황주(黃州)로부터 서쪽으로 꺾어 겸이포(兼二浦) 부근에서 대동강을 건너 우안(右岸)을 따라 월강(月江), 보산진(保山鎭), 오리동(五里洞)을 거쳐 전진해 서북면에서 적의 퇴로를 끊게 하였다. 그때는 바로 더위가 매우 심하였고 지방의 물자에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토민(土民)이 도망쳐 군역에 복무하는 자가 없어 아군을 크게 힘들게 했다. 그렇지만 각 부대는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예정대로 전진하여 9월 15일 평양을 총공격하여 청의 장수 좌보귀(左寶貴) 이하 약 2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달 16일 평양을 완전히 함락하였다. 패잔병은 야음(夜陰)을 틈타 의주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노획한 무기, 화폐, 양말(糧秣)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17일 우리 연합함대는 적 함대 10여 척과 대고산(大孤山) 앞바다에서 싸워 경원(經遠), 치원(致遠), 초용(超勇), 양위(揚威)를 격침하고 그 밖의 여러 함선에 타격을 가해 제해권은 완전히 우리에게 돌아와 해상의 수송은 비로소 안전해졌다. 이전에 대본영으로부터 제3, 제5사단으로 제1군 전투서열을 명하자 군사령관 육군 대장 백작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9월 14일에 인천을 통해 경성으로 들어가 제3사단의 대부분으로 하여금 평양 공격에 참여하게 하였다. 16일 그 선두 부대와 함께 고양에 다다르자 평양은 이미 함락되었으므로 군사령부를 이끌고 전진해 25일 평양에 이르러 제5사단은 평양ㆍ안주 및 정주 부근에, 제3사단은 평양ㆍ황주 사이에 병력을 결집하여 압록강으로 향하게 하였다. 제1군사령관은 10월 3일부터 차례로 각 부대를 의주 방면으로 결집시키려고 하였는데 지방 물자가 전혀 없고 운반력의 결핍이 평양 이남보다 매우 심한 데다가 해운편이 예상대로 진척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일시 전진을 중지하였다. 같은 달 6일부터 12일까지 7일간 전군이 동원되어 양말의 운반에 종사하였다. 그 뒤 이호포(耳湖浦) 부근의 양륙(揚陸) 지점을 발견하여 병참부 및 군대에 의해 수송하는 양말 약간을 저장하고 또 오토리 공사를 거쳐 자주 조선 정부에 독촉하였던 지방 운반 재료의 징집 및 용역 업무(한인은 게으른 성격이어서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행군 중 화물을 방치하고 도망치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관리는 청국의 후환을 두려워해 인민을 협박하여 우리 군대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도록 하고 일본 화물의 통용을 거부하는 등 우리 군대에 크나큰 방해를 가하였는데 여러 차례 교섭한 뒤 겨우 군대의 사역에 복무하게 되었다)도 거의 실마리가 풀리자 제1군은 다시 같은 달 14일부터 그 행동을 개시해 24일까지 의주 부근에 집중해 점차 압록강을 건너 전진해 안평(安平) 하구, 호산(虎山)의 전진 진지를 약탈하고 같은 달 26일 구련성(九連城) 및 안동현(安東縣)을 점령했다. 이로부터 야전대의 작전은 청국 영토 안으로 이동해 조선을 병참선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대본영은 후비대(後備隊)를 편성해 병참 수비로 삼아 도한(渡韓)하게 하였고 제1군에서 머물게 한 수비대와 다음과 같이 차례로 교대하게 하였다. ※ 표1 삽입 위의 부대 외에 후비보병 제6연대(제2중대 결) 및 제3사단 후비기병 1소대 및 제6사단 후비공병 1중대를 제1군병참부의 전투서열에 속하게 하여 9월 25일까지 인천에 상륙해 대동강 이북의 야전대와 교대해 병참 수비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대동강 이남은 남부병참감[소장 후쿠바라 도요노리(福原豊功)]의 지휘에 속해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병참 수비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동학당은 전라, 충청, 강원, 경상의 여러 도에서 다시 일어나 우리 병참선을 위협하고 자주 전선을 절단하였다. 병참수비병이 이를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폭도의 집산이 일정하지 않아 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11월 초순 남부병참감의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므로 인천병참사령관 포병 중좌 이토 스케요시(伊藤祐義)는 후비보병 제18대대 제1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 및 후비보병 제10연대 제4중대와 협력해 주로 경성 이남의 폭도 소탕을 맡아 제천, 평창, 정선, 충주, 연산(連山), 공주, 개령(開寧), 거창, 남원, 전주, 무주, 순천, 나주 지방에 분진(分進)하였다. 1895년 1월 상순 각지의 폭도가 완전히 진정됨에 따라 각 부대는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이보다 앞서 1894년 11월 하순 황해도 지방의 폭도는 평산(平山), 강령康翎), 연안(延安), 황주(黃州) 부근 송화(松禾), 장연(長淵)의 각지를 소란스럽게 하여 병참사령부 역시 그 습격을 받았다. 후비보병 제6연대 제4중대 및 제7, 제8중대의 일부는 그 토벌에 종사하여 1895년 2월 상순 일시 진정되었으나 3월 하순 다시 봉산(鳳山), 신천(信川) 부근에서 봉기하여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가 이를 진압하였다. 4월 17일 일청(日淸)강화조약이 성립해 조선국의 독립은 열국(列國)이 공인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제국 정부는 재한 거류민 보호 및 군용 전선의 엄호를 위해 임시헌병대 및 보병 1개 대대를 경성, 부산, 원산에 주둔하고 5월 후비 각 부대를 일본[內地]으로 귀환시켰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