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깃발을 올리다 [1894년 2월 25일, 음력 갑오(甲午) 정월 10일] 동학당의 원한이 쌓인 것이 오래되었다. 언젠가는 그 생각을 풀기 위한 시기를 엿보고 있던 때 마침 부산에서 70여 리 떨어진 전라도의 고부(古阜)라고 하는 곳의 군수 조병갑(趙秉甲)이라는 자가 지난가을 고부 지방이 매우 풍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방곡령을 발포하였고 자신의 친족으로 하여금 몇천 석의 쌀을 사들이게 해 이익을 보게 하였다. 게다가 조미(租米)를 징수할 때 비상수단을 통해 멋대로 학정(虐政)을 하였다. 이미 지난겨울 10월에는 그 폭관(暴官)을 향해 봉기를 일으키려 한 적도 있었으므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날을 기해 동학당이 동진(東津)의 나루터에 모여들었는데 그 세력이 대략 500명이었다. 이 군사 가운데에는 14~15세의 소년도 섞여 있는데 모두 도보로 앞다투어 군수 조병갑의 성문으로 몰려들어 오로지 그 침소를 공격하려 하였다. 조병갑은 재빨리 이를 탐지하여 단신으로 도망쳐 군내의 명문가인 정(鄭) 모에게 의지해 변장하고 고부의 다음 고을인 정읍(井邑)이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전주의 감영으로 가 감사와 모의해 1천 명의 군대를 빌려 난민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감사가 받아들이지 않아 일단 조정에 급보(急報)하여 그 지휘를 기다렸다. 고부군은 28개 촌락으로 구성되었고 토호가 매우 많고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다. 줄포(茁浦), 염소(鹽所), 동진(東津), 사포(沙浦)의 네 항구로 적출(積出)하여 인천이나 부산포 등 교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조선 팔도 가운에 주요한 장소이다. 아울러 기록하면 군수 조병갑은 지난번 함경도 방곡령 사건과 관련해 그 이름이 알려진 조병식(趙秉式)의 조카라고 한다. (2) 적의 세력 이번에 바로 응한 촌락이 이미 15곳이고 전 부대가 1만여 명에 미쳤다. 수령은 세 명 있는데 전명숙(全明叔), 정익서(鄭益瑞), 김 모라고 한다. 전명숙은 총대장이고 정익서와 김 모는 이를 보좌한다고 한다. 이리하여 일거에 군수의 성을 함락하고 대단한 세력을 보이며 고부로 향했다. 군수가 없는 것을 알고 곧바로 나아가 전주의 감영을 공격했다. 동시에 이번 거사를 전해 듣고 각지에서 응원하는 자가 일어나 순식간에 전라, 충청 양도가 모두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전주의 감영이 이들과 싸웠는데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여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학당의 군세가 날로 증가하였다. 이곳저곳을 함락하며 연전연승하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같이 대단한 세력으로 확대되었는지를 생각하니 여기에는 와전과 미신이라고 하는 부분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 첫째로는 조선은 5백 년이 되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 국내에 유포되었다. 올해는 이씨가 세상을 장악한 지 바로 503년이다. 완미(頑迷)한 조선인의 신심(信心)과 조선 정부의 혼란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동학당의 수령은 올해 불과 14살이 되는 한 신동이다. 성은 이(李)라고도 하고 김(金)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구구하다. 그리고 그 소년이 신술(神術)을 부려 백전백승이며 이 소년이 한 번 백기를 흔들 때는 탄환이나 화살이 모두 적중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쨌든 조선에는 신문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뜬소문이 무성하여 어느 것이 진실인지 쉽게 믿을 수 없다. 말하기를 동학군에는 대장, 좌대장, 우대장의 세 명의 장수가 있어서 군사를 총괄한다고 하는데 그들 세 명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서 기술한 명칭 외에 정도령(鄭道令), 서혜각(徐蕙角), 최대웅(崔大雄)이라는 세 명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 상상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말하기를 동학군 안에 반드시 외국인 참모가 있다고 하는데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군령이 엄명(嚴明)하고 작전법에 크게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어 좀처럼 조선인이 꾀하는 것이 아닌 점이 있다고 한다. 그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른다. 동학당의 형세가 이같이 날로 번성하고 날이 갈수록 군세가 늘고 있기 때문에 각지의 지방 관장은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과장된 말을 내놓고 당장이라도 함락되려 한다든가 이미 격파당한 것처럼 급히 파발꾼을 보내 원병을 청하여 여러 번 중앙정부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 근거 없는 뜬소문이 속출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별하기 어렵게 하는 까닭이다. 동학당의 세력에 관해 전해지는 것 가운데 반 이상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그 세력이 제법 번성한 것은 진실이다. 동학당 무기의 대부분은 나중에 전주 감영을 함락했을 때 약탈한 것이다. 전주의 감영에 비치되어 있던 총의 숫자는 불과 1천여 정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내려온 관군은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군의 식량은 부족하지 않다. 동학당 가운데에는 호농(豪農)과 신상(紳商)이라고 불리는 자가 적지 않다. 또 무위(武威)를 두려워해 항복한 자 또한 쌀과 보리를 급여하므로 그들의 군량은 그다지 지장이 없다. 동학당에 항복한 관군의 다수는 미국과 프랑스의 신식으로 군사훈련을 해 다소 군대의 조식(組式)과 행진 등에 익숙함으로써 진퇴는 매우 쾌활한 기풍을 갖고 있다. 동학군 안에 흰 두건 부대[白巾隊]라고 하는 한 부대가 있다. 혹은 백장미군(白薔薇軍)이라고 부른다. 부대원 일동이 하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사실 이 부대는 동학군의 중견으로 제일 강병이다. 동학당 한 부대의 기세가 이와 같고 우리는 지금 이 군대를 동학군이라고 부르지만 전 부대가 동학당은 아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의 군사가 있다. 첫째는 주모자 동학당, 둘째는 투입자 농민, 셋째는 관리로 퇴직한 자이다. 모두 오합(烏合)의 세력이지만 깔볼 수 있는 작은 적이 아니다. 조선의 관군은 매우 급하게 조련을 한 듯 숙련되지 않은 병사로 오합의 부대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3) 날마다 더욱 창궐 이리하여 동학군의 세력이 완전히 강해졌다. 연전연승하면서 맹호가 우리에서 벗어난 것 같았는데 그로부터 약 30일이 경과하여 더욱 사나와져 마침내 세계에서 좌시할 수 없게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인천발(5월 11일) 전라도와 충청도의 민란은 실로 두려워할 세력이 되었다. 전주의 감사는 이를 진무(鎭撫)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홍재희[洪在喜, 정령관(正領官)으로 일본의 좌관(佐官)에 해당한다]에게 명해 군사 5백 명을 인솔하여 내일쯤 해로를 통해 인천을 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같은 인천발(5월 16일) 평안도에도 폭도가 일어나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였다고 한다. 같은 인천발(5월 12일) 전라도 고부의 소란과 동시에 일어난 충청도의 동학군도 기세가 날카로워 지금 이미 청주는 그들에게 포위되었고 주(州)의 병사(兵使)는 이를 진무하려고 애를 썼지만 제령(制令)이 조금도 행해지지 못했다. 이러한 내용이 임금에게 보고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얼마 전까지 거문도 첨사(僉使)였던 조의문(趙義聞)이라는 자를 발탁해 청주영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명을 받들어 출발했다고 한다. ○서학당(西學黨)도 다시 일어나 충청도 각지에서 봉기했다고 한다. 김해부(金海府) 경상도 김해부의 부민 약 8천 명이 갑자기 크게 일어나 부성(府城)을 습격해 부사를 추방하고 속리를 감옥에 가둔 뒤 관찰관(觀察官)의 현명한 판단을 청하려 한다고 한다. 전라도 고부 이하 흥덕, 나주, 공인(恭仁), 고창, 부안 등이 연합한 대 민란은 전에 선무사(宣撫使)를 파견해 효유(曉諭)하여 해산하려고 하였지만 조금도 복종의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부의 현관(縣官)을 체포하여 이를 화형에 처하는 등 그 흉포함이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과연 머뭇거리던 정부도 이에 질려 더 이상 타이르더라도 효과가 없음을 인정하고 마침내 출병하여 정토할 것을 결정했다. 병사(兵使) 홍재의(洪在義)[지금은 개명해 계훈(啓薰)이라고 한다. 지난해 동학당이 봉기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충주까지 출장한 사람]를 양(兩) 정토사로 삼아 친군 장위영(壯衛營)의 군대 8백 명을 출진시켰다. 이들은 대포 2문, 탄약 60여만 발을 장비하고 인천으로부터 중국 군감(軍鑑) 평원호(平遠號)에 3백 명을 태우고, 4백 명을 전운서(轉運署) 기선인 창룡호(瘡龍號)에 태우고, 나머지 백 명을 한양호(漢陽號)에 태우고 5월 8일 오후 3시경 세 함선이 연이어 인천을 출발해 충청도로 향했다. 부기(附記)하면 팔도가 이미 혼란된 상태이므로 당초 예정한 헌릉과 인릉의 행행(行幸)은 음력 4월 3일이 항례이지만 당분간 연기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상 서술한 것과 같이 지금 동학군의 총 세력은 5~6만 명 이상에 달하고 각 고을에 은연히 출몰하여 모이고 흩어짐이 일정하지 않지만 세력이 매우 맹렬하다. 각 주읍(州邑)의 소리(小吏)로 현세에 뜻을 얻지 못한 자가 날로 그 세력을 늘리고 재주를 갖고 있지만 쓰이지 못하는 자, 무를 배워 몸이 살찌는 것을 탄식하는 자 모두 적당에게 달려가 소두령(小頭領)이 되었다. 그러므로 군량은 임의로 약탈해 가고 지난날 당인(黨人)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집은 모두 약탈해 간다. 또 당인의 소두령은 대체로 각 고을의 소리(小吏)가 망명한 것이므로 각지의 향군과 통하는 편리함이 있다. 또 그 직권을 휘둘러 향군을 움직이고 복종시키기조차 한다. 당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앞에 서술했듯이 전주를 함락했을 때 총을 얻었는데 대개는 긴 창과 긴 칼을 휴대한다. 그 가운데는 조총을 휴대한 자도 있다. 당인의 표시로는 황건과 황기(黃旗) 모두 황색 옷을 입고 황색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황색 깃발을 사용한다. 앞서 기술한 백건대는 이에 대비되는 부대의 표시이다. 군령은 네 개 조항이 있다. 첫째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해하지 말라. 둘째 충효 두 가지로 모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 셋째 양왜(洋倭)를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맑게 한다. 넷째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모든 권세 있는 높은 자들을 멸하여 크게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정해 성훈(聖訓)에 따르도록 한다. 요컨대 앞서 서술한 주안으로 삼은 바와 크게 같다. 그 세력이 이와 같아 토벌하러 간 각 영의 관군도 모두 함께 패해 도망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고 또 굳이 나아갈 용기가 없다. 전라도와 충청도 양도의 감사가 모두 상황을 자세히 적어 위급함을 서울에 알리고 점차 토벌군이 파견될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적군은 이르는 곳마다 군사(郡司), 현령, 부사, 목사를 모두 쫓아냈다. 지금 전라, 충청 두 감사 및 정토사 등이 보낸 13일 이후의 주요한 소식을 보면, (14일 충청감사 보냄) 관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적도 수천 명이 여러 곳에 모여 각 읍을 침략한다. 관리와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이 더욱 많고 이에 응하는 자도 더욱 많다. 오합지졸이라고 하지만 관군은 매우 적어 중과부적이다. 현재 조달해 보낸 병사가 겨우 2백 명으로 어찌해도 방도가 없다. 신속히 충분한 지휘를 청한다. 만일 일이 지체된다면 적도가 더욱 만연할 것이다. (같은 시각 전라도 감사 보냄) 적도가 정읍에서 관군을 크게 격파한 뒤 다시 고부 삼거리를 향해 모였다. 각 읍에서 이에 응하는 자가 구름과 같고 초토사가 이를 당해낼 기력이 없다. 오늘까지 관청의 무기를 빼앗긴 곳이 십여 곳이고 관리가 쫓겨난 곳이 13개 읍, 살해된 곳이 4개 읍이다. (같은 날 초토사 보냄) 전주 감영의 우영관(右領官) 이경호(李璟鎬)가 병사를 이끌고 적군과 싸웠으나 마침내 패하여 죽다. 전주감사[完伯]가 이를 위해 상을 치렀다. (같은 날 전라도 감사 보냄)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이 어떤 연유로 인해 속리(屬吏)인 중요 인물을 죽임에 따라 그 동료들이 크게 이에 분노하여 관택에 난입했다. 그 일가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살해당했고 목사는 도망갔다. 부안 근방 13읍의 수령이 모두 도망쳐 송감영(松監營)에 들어갔다. 적도는 빈틈을 타고 무기와 전곡(錢穀)을 빼앗아갔다. (4) 연전연승 동학당의 기세가 더욱 맹렬해져 바람을 타고 들판에 불을 지른 것 같다. (5월 22일 경성발) 이른바 동학당의 거괴(巨魁)가 나주, 광양, 부안, 흥덕, 고창 및 고양(高陽) 등을 복종시키고 한 개 부대 8천여 명이 익산의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북쪽을 따라 경기 지역을 공격할 기세라고 한다. (5월 27일 경성발) 지난 5월 25일 동학군의 주요 장수 정가(鄭歌)가 지뢰화(地雷火)를 이용해 관군을 남호(南湖)에서 크게 무찔렀다. 관군 중 전사자가 2백여 명이고 포로로 잡힌 자가 32명이다. 동학군은 승리하여 무기와 군량을 빼앗고 보성에 자리를 잡아 위세가 더욱 커졌다. 관군은 군량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를 덮쳐 전곡을 약탈했다. (5월 29일 부산발) (오늘 새벽 군산도 고부 앞바다)에서 조선 배 두 척이 동학군의 습격을 받아 미두(米豆) 총 3백여 석을 약탈당했다. (5월 26일 부산발) 지난 5월 13일 정오 홍(洪) 초토사가 편장(褊將) 원세록(元世祿)을 보내 경군을 이끌고 전주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차마산(車馬山) 아래에 진을 치고 포를 쏘게 했다. 이것은 단지 위세를 보이려 했을 뿐이다. 초토사는 양호(兩湖)의 적의 기세가 매우 맹렬하므로 쉽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음력 4월 10일 초토사의 전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보냄) 적도 수천 명이 남쪽 나주로 향했다. 감사가 급히 여러 목사와 각 읍에 관문을 발송해 수비를 엄히 하도록 하였으나 각 읍에 관리가 없는 곳이 많다.(음력 4월 13일 감사의 전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보냄) 편장(褊將) 원세록(元世祿)이 행방불명되었다. 전에 초토사가 원씨에게 적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지만 원씨의 부대가 길에서 적도 천여 명을 만나 패배하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 부하 50여 명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경군은 이로 인해 몹시 두려워한다. (음력 4월 12일 경상도 감사가 보낸 전보) 앞서 경군 중 총으로 무장하고 경성을 나선 자가 실로 7백 명(8백 명이라고도 한다)인데 군산에 상륙한 뒤 나날이 도주하여 지금은 남은 자가 470명이다. 그리고 아직도 도주가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아! 어찌 조선군의 정예라 할 것인가. 5월 15일 동학군의 장수 서운개(徐云蓋)라는 자가 경상도 함양의 지방 관장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이번 달 15일(양력 5월 19일) 우리 군이 함양을 향하니 너는 충분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수(秋水)가 순식간에 너의 목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했다. 동도(東徒)는 또 영남을 침범할 기색이 있어 현리(縣吏) 등은 낭패하여 급히 요새를 견고히 하고 이에 대비했다. (5월 26일 부산발) 영관(領官) 이하 사망자는 14명이다. 무기는 모두 동학군에게 빼앗기고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다. 아직 습격받지 않은 황토산(黃土山) 같은 곳은 공곡(公穀)과 공전(公錢)을 지출하여 방어를 게을리하고 있지 않다. (13일 초토사가 보낸 전보) 원세록이 어제 무사히 군진으로 돌아왔다. 이두황(李斗黃)등에게 명하여 2개 부대를 이끌고 금구, 태인, 고창, 흥덕 등지로 향하게 했다. (15일 초토사 암호전보) 동학군 만여 명이 영광군에 모여들었다. 5리에 복병이 있고 30리 지점에 선봉군 2,500여 명이 있다. 적은 산과 들판에 가득 찼다. 사방의 양민이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관군의 위급함을 알리는 것이 날로 많다. (같은 날 전라도 감사 암호전보) 동학군의 한 부대 1만여 명이 영광을 습격했다. 군수 민영수(閔泳壽)는 배를 띄워 칠산진(七山津)으로 피신했다. 적병이 승리를 틈타 성안으로 침입하여 무기와 화약을 빼앗고 부고(府庫)와 네 문을 봉쇄하여 출입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적병은 여기에 자리 잡고 고수할 뜻으로 보인다. (5월 20일 음력 4월 16일) 관선인 한양호[이운사(利運社)의 작은 증기선]가 공미(貢米)를 적재하기 위해 4월 13일 영광 구수포(九岫浦)에 도착했다. 동도 수만 명이 법성과 구수의 양 산허리에 자리 잡고 크게 싸워 관선을 막았다. 갑판을 파쇄하고 뱃사공과 타고 있던 일본인 등을 구타하고 인천항 위원 김덕용(金德容) 등 여러 명을 포박했다. 한양호는 빈 배로 군산으로 돌아갔다. 전에 적병에게 주륙(誅戮)당한 김세풍(金世豊)의 아들, 사위, 동생, 조카 등 11명은 전주 남문루에 글을 내걸고 도망쳐 적에 투항했다. 그 글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면, 요즘의 일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다. 최근 이른바 집권 대신은 모두 민씨 성이고 온종일 배를 채우고 사욕을 영위한다. 아! 이 백성을 어찌할까. 이른바 초토사라는 자는 무식하고 겁이 많아 머뭇거리며 진군하지 못한다. 그리고 멋대로 바탕이 선하고 공이 있는 선비를 죽인다. 이것은 바로 이름을 취하고 거짓을 장식하는 자로 머지않아 반드시 독한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3년 뒤 나라는 아(俄, 러시아)에 귀속되고 사람은 서양화될 것을 동도의 대장은 걱정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민생을 편안히 한다고 한다. 동학당이 연전연승하여 그 기세가 왕성한 것은 위에 기술한 바를 통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많은 관군의 장교가 맞아 죽고 병사 가운데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다. 전주는 거의 동학군에게 공략되어 전보가 통하지 않는다. 동학군이 승리를 이어 가 경성에서 육로로 26리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조선 정부는 낭패하여 다시 6백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6월 3일 정오 인천발) (6월 같은 날 오후 경성발)에서 말하기를 관군이 또 전주, 지산(砥山)에서 대패하여 부장(副將) 이하 사망자가 2백여 명이다. 동학군은 홍주(洪州), 석성(石城)을 점거하고 바야흐로 경기로 나가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다시 5백 명의 군사를 보내 태안(泰安) 요충로를 막았다. (5) 일본공사의 파견 조선의 내란은 동학당의 세력이 점점 더 매우 창궐하여 마침내 전라 전도를 함락하고 나아가 석성을 추격하여 지금은 바야흐로 경성에 진공하려는 기세이기 때문에 우리 일본제국은 오토리(大鳥) 주한공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6월 5일 오전 11시 45분 신바시(新橋)발 기차로 출발하였는데 그 일행에는 모토노(本野) 외무참사관과 다카자키(高崎) 경부가 인솔하는 경시청 순사 20명이 수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행의 출발 모습을 들어 보니 무쓰(陸奧) 외무대신, 하야시(林) 차관, 외무성 고등관 및 조선공사 등은 모두 신바시까지 가서 전송했다. 이렇게 기적소리가 울리며 요코스카(橫須賀)를 향해 출발했고 그곳으로부터 군함 야에야마(八重山)호를 타고 직항하였다고 한다. (6) 조선 조정의 정략 이번 내란에 관해서 조선 조정이 놀란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 첫 번째는 지난해의 동도와 마찬가지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즉, 지난해의 폭동은 한쪽의 윤지(綸旨)를 가지고 어윤중(魚允中)이 안무(按撫)함으로써 쉽게 해산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사례에 따르려고 했지만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이 수단은 효능이 없지만 만일 8백 명의 정토사가 도착한다면 오합의 무리는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고 도리어 반동할 뿐이다. 서양식으로 조련을 받아 대오가 정연한 부대는 1백 명 이상이나 탈주했다. 어찌 낭패하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서 외국 군대를 빌리자는 논의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외국 군대를 빌린다면 모조리 다 진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외국 군대란 필시 중국군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이 아무리 암명(暗冥)하다고 해도 눈을 뜬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인가. 다음 반론에 의해 배척되었다. 그 요지를 말하자면 지금 동도의 기세가 맹렬하고 헤아릴 수 없어 어쩌면 기세를 돋우어 나아가 북상할 우려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 무엇보다 아픈 근심을 금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란을 진압하는데 외국군을 통해서 하려는 것은 단지 자주자호(自主自護)의 큰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외국 간섭의 단서를 열어 그 후환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특히 청국과 일본 어느 쪽의 군대를 빌리려고 하더라도 현존하는 천진조약을 어찌할 것인가. 만약 이를 깨 버린다면 양국의 쟁론이 곧바로 일어나 조선 땅이 청국과 일본이 전쟁하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는 큰 사태에 이르는 것도 역시 헤아릴 수 없다. 우리나라가 최근 10년 동안 무사한 것도 필시 양국 조약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따져 묻지 않고 함부로 외국군 차용을 말하는 것 역시 사려가 매우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결코 이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 외국군 차용의 논의는 다음 한마디 말로 보기 좋게 배척되었으므로 나아가 군대를 출진하는 것 외에 없다며 마침내 정토군을 증원하여 보내기로 결정했다. 강화유수 겸 해군총제사(海軍總制使) 민응식(閔應植)은 지난 18일 강화로 내려가 그곳의 영병(營兵) 5백 명을 징발하고 그 영의 중군(中軍) 서병훈(徐炳薰)을 총괄하는 장수로 삼아 탄약 40만여 발을 준비하여 민응식이 전송했다. 아울러 동반하여 지난 21일 인천으로 가서 해상의 식사용으로 빵 1천 근을 다이부스(大佛) 호텔에서 구입하고 비 오는 날씨에 석탄 적재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다음 날인 22일 오후 5시 조선 기선 현익호(顯益號) 및 해룡호(海龍號)를 타고 전라도로 향했다. 서둘러 상륙하여 전주 감영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던 홍 초토사의 군대와 합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군 차용의 잘못된 생각은 완전히 배제되어 초토군이 새로이 편성되었다. 그렇지만 국왕의 뜻은 안무에 있고 토벌에 있지 않았다. 단지 안무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실제 회유를 행하려 하여 전라도 감사를 경질함을 첫째로 삼았다. 양호의 대소 지방관을 다시 선정하고 그 실정(失政)을 인정하는 자를 처벌함과 동시에 지난해의 사례와 같이 윤지를 발포해 먼저 교화하고 나중에 처벌한다는 취지에서 무슨 일이라도 이를 용서하고 고쳤을 때 굳이 처벌하지 않고 재삼 반복하여 여전히 고치지 않는다면 토벌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학진(金鶴鎭)이라는 자를 새로운 전라감사로 임명하고 전임 감사 김문현(金文鉉)을 폐하였다. 이리하여 신임 감사로 하여금 각지를 돌며 위무하게 했다. ○국왕이 하사한 교시(敎示)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부의 군수 조병갑은 격식을 갖추어 잡아와서 남간(南間)에 가두라. 1. 그 이외의 지방 수령이라도 탐학한 자는 일일이 그 죄를 논하여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 1. 대신 이하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나라가 정치적으로 어지러울 때에 수수방관할 것인가. 특별히 보국안민의 방책을 올려야 할 것이다. 1. 전라감사는 특히 월봉(越俸)의 조치를 하여야 할 것이다.[벌봉(罰俸)] 1. 도주하는 각 수령은 죄의 경중을 논하여 그 조치를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 정부에서 내린 난민을 위무하는 훈령은 다음과 같다. 동학 무리의 군세는 모두 영광에 모였으므로 초토사 즉, 경군에 명하여 지난번에 이미 그곳으로 향하게 하여 지금은 바로 일대 결전이 벌어지려고 하는 때이다. 윤지가 갑자기 내려왔으므로 잠시 창을 거두고 그 윤지 즉, 완백(完伯, 전라감사)을 파면하고 고부군수 조병갑을 체포해 옴으로써 위무의 뜻을 보였다는 것을 포고한다. 그래도 이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바로 경군을 통해 토멸(討滅) 압살(壓殺)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다. (7) 각국의 진발(進發) 영국 함대 5척이 나가사키에 정박 중이었는데 곧바로 요코하마로 가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조선국 내란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바삐 향했다. 중국, 미국 기타 군함 인천에 모이다. 중국군 천오백 명이 상륙했다는 6월 7일 오후 1시 30분 인천발 급전(急電)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군도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 밖에 청국 정부는 조선 정부의 의뢰에 따라 원병 1만 명을 조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제1차 출병으로 이홍장 씨가 이끄는 서양식 훈련의 정예병 3천 명을 위해위(威海衛), 대고(大沽) 두 곳으로부터 출발하게 하여 이미 반은 인천으로 반은 아산(경성에서 불과 18리 24정 떨어진 충청도의 해안에 있다)에 상륙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국군의 수는 1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에 관해서는 논평이 구구하다. 조선에 파견된 청군 사령관은 이홍장의 해군 참모장 가(珂)씨이며 60세가 넘은 늙은 장수라고 한다. 중국군 1만 명을 보냈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설이 구구해 진짜라고도 하고 거짓이라고도 해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현재 청국의 병제에 밝은 모 관리의 설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이번에 조선의 요청에 의해 출병한 것은 사실일 것이지만 그 병력 수가 1만 명이라는 것은 조금 과장된 감이 있다. 설령 1만 명이라고 해도 그 정수(正數)는 6~7천 명 정도의 병력으로 보아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원래 이홍장의 감독 아래에 있는 군대는 대개 유럽풍으로 훈련을 하고 그 총기도 모두 새로운 것을 사용하며 군기가 매우 엄정한 듯하지만 그 장관(將官)은 항상 정원의 어느 정도를 줄여 그 비용을 줄이는 폐가 있다. 예를 들면 1개 대대가 6백 명이라고 하지만 그 실수는 항상 380~390명 내지 400명 정도가 보통인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에 1만 명의 군대를 보내더라도 그 정수는 6~7천 명 정도로 보아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청국 전권공사 원세개(袁世凱) 씨의 헌책 조선 정부는 동학당 변란에 대해 이번에 청국에 원병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원병을 청하게 된 것은 온전히 원세개 씨의 헌책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국왕 전하를 내알(內謁)하여 이 원병에 대해 헌의(獻議)한 것 으로 보인다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러시아의 출병 청국이 조선국을 향해 출병함과 동시에 러시아도 역시 조선국을 향해 출병하였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가 과연 조선에 군내를 보냈다고 한다면 그 군대는 필시 블라디보스토크항 근처에 주둔하는 육군일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항 근방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의 수는 1만 5~6천 명 이상이다. 또 그 항구에 정박하는 함대는 상비함대 12척으로 조직되고 이 밖에 의용함대 6척이 있어서 모두 18척의 군함이 항상 그 항구 근해에 출몰한다. 갑자기 일이 생길 때는 곧바로 집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 러시아가 조선에 출병했다고 한다면 이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주둔하는 육군 부대 가운데에서 파견되었을 것이라고 러시아 형세에 정통한 사람이 말했다. (8) 일본제국의 출사 6월 9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특별히 육군성의 허가를 받아 게재한다는 기사를 보니, 동학당의 세력이 더욱 매우 창궐해 조선 정부가 이를 잘 진압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에 조선에 있는 우리나라 공사관, 영사관 및 국민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우리 정부는 출병하는 사실을 중국 정부에 조회하여 알렸고 중국 정부보다 먼저 조선 정부에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파견되는 군대는 제4,5사단 병사로 조직된 혼성여단이라고 하며 6월 9일 히로시마현 우지나(宇品)항에서 일본 운송선을 타고 출발한다고 한다. 상세한 것은 일정에 따라 추가로 기술할 것이다. (9) 경군과 동학군의 대체적인 세력 이전에 출발한 초토군이라는 것은 그 본래 취지가 안무하는 데 있으므로 굳이 전투를 하려 하지 않고 단지 완영(完營, 전주 감영) 근방에 모이는 것을 멀리 쫓아낼 뿐이고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순라(巡邏) 또는 척후(斥候) 등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발생한 것이 조금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서로 승패가 있었던 것은 감사와의 전투만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한 국부(局部), 한 지점의 승패에 의지하지 않고 대체로 생각해 보면 양군의 대세를 살필 수 있다. 원래 이번 전투가 일어난 곳은 고부로 동학도는 잠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근방인 금경(金頃), 만경(萬頃), 금구, 태인 등 사이에 출몰했는데, 초토군의 한 부대가 전주에서 나와 정읍으로 나아가자 동학군은 무장(茂長)으로 물러났고 차례로 관군이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영광에 이르러 동군(東軍)은 셋으로 나뉘어 하나는 영광에 머물고, 하나는 함평으로, 또 하나는 무안으로 철수했다. 초토군은 계속 추격했으나 5월 22일 현익(顯益)과 해룡(海龍)호에 탑승해 인천을 출발한 강화 군대는 목포로 상륙해 적의 앞으로 나가고 초토군이 후미를 잡았다. 그리하여 협격(挾擊)하려는 전략이었는데 동군도 일찌감치 이것을 살피고 셋으로 나눠 둔영(屯營)의 병사를 모아 멀리 달려가 나주를 넘어 장성으로 들어갔다. (10) 전주의 함락(앞 항목에서 이어짐) 지난번 초토사가 장성으로 들어간 동군을 쫓는 도중에 어찌하든 초토사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문(關文)을 보내 근방으로부터 임시로 각 읍리(邑里)에서 30~40명씩을 소집하였는데 어느 날 150여 명의 민병부대가 진문(陣門)으로 다가와 지난번 초토사가 보낸 관문을 보여 주며 소집에 응하였다는 연유를 밝혔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뜻을 칭찬하고 융숭히 취급하여 그대로 부대 안에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군을 내보내 장성 근방의 월평(月坪)에 이르러 동도(東徒)와 마주쳐 전투를 개시하던 중 150명의 민병이 두 편으로 나뉘어 좌우로부터 급하게 협격하였다. 이 순간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세 방향에서 공격하니 경군은 대패하였다. 전군이 괴멸하고 인마(人馬)는 깔리고 대열이 흐트러져 쓰러진 자가 약 4백여 명이고 패잔병도 또한 거의 모두 도망쳤다. 동군은 승기를 타고 진격해 오후에 어렵지 않게 군영을 접수하였다. 이 150명은 민병이 아니라 동군으로 관문을 위조한 것이다. 전주 함락의 비보가 중앙정부에 도달하였을 때 마침 이 패전 소식과는 관계없이 인천부 총제영의 병사 70여 명이 공미(貢米)를 경호하기 위해 바로 출발하려고 하였는데 정부는 급히 전보를 보내 출범을 연기하게 했다. 또한 다음 전보를 통해 오늘 중으로 빵 3천 근을 만들게 하였다. 이리하여 다음 날인 6월 2일 평양의 병사 6백 명을 창룡(蒼龍)호에 태우고 남도로 향하게 했다. 전주 함락을 전후해 다음과 같은 소식이 있었다. 전주의 패전 소식과 대조한다면 이 며칠간의 상황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5월 29일 법성(法聖)에서 보낸 통신에 따르면, 관군과 적도 양군의 최근 동정을 살펴보면 관군은 영광(靈光)에 임시로 군영을 설치하고 적군은 장성(長城) 옆의 산허리를 점거하여 양군이 서로 거동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관군은 병사를 두 개 부대로 조직하여 한 부대는 2백 명에 대포 2문을 갖추어 고창을 경유하고, 또 한 부대는 50명에 대포 2문을 갖추어 삼계(森溪)를 경유해 양쪽 모두 적진을 향해 출발한 것은 5월 27일 오전 4시경이었다. 같은 날 오후 6시경 장성에 도착했다. 적군은 그 수가 불과 1백 명에 지나지 않고 매우 허점이 있었다. 관군과 적군 진영은 불과 3~4정(丁) 떨어져 있어 서로 총격을 시작했는데 적군은 점차로 다수가 되었다. 특히 또한 좌우 양쪽으로부터 복병이 들고 일어났다. 그 인원수는 1천 명에 달했고 그 기세는 파죽과 같았다. 관군은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미 크게 패하여 포병 장교 한 명은 포로로 잡혔고 또 대포 6문을 약탈당했고 사상자는 실로 1백 수십 명에 달했다고 한다. (11) 청군의 거동 앞서 청군 1천 5백 명[군대 삼위(三衛)]이 충청도 아산에 상륙했다고 하였는데 9일 인천발 보고에 따르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청국으로부터 한국에 파견된 청군 장교의 대부분은 저 마적의 내란을 토벌한 자라고 한다. 청군은 다시 삼위를 파견할 예정이지만 아직 출병할 형편은 아니라고 한다. 청국 군함은 경비선 네 척이며 모두 인천 및 아산 근방에 있다. 함대는 즈푸(芝罘) 근방에 상비함대가 배회하고 있다. (9일 인천발 전보) 청군 1천 명이 마산으로 온다고 한다. (12) 일본군 경성으로 들어가다 6월 9일자로 출발한 일본의 육군 부대는 12일 인천에 상륙하여 둘로 나뉘어, 하나는 인천 재류 일본인 보호를 위해 항구에 머물고 나머지 1천 2백 명은 14일 경성을 향해 진군했다. 일본 해군이 앞서 재류 인민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에 대신했다. 그 주재소는 일본공사관 근처 주동(鑄洞), 필동(筆洞)의 거류민단으로 이를 충당했다. 오시마(大島) 여단장을 비롯해 장교는 공사관 안에서 숙박했다. 입경 시의 성황(盛況)을 기록해 보면, 군대의 큰 깃발을 가장 선두로 펄럭이며 대오가 모두 당당하고 걸음걸이가 엄숙하여 경성에 있는 그 모습은 바로 과거 분로쿠(文祿) 시기를 떠올리게 하였다. 조선의 인민은 용맹하고 장한 우리 군대를 보려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를 구경했는데 모두 두려워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재류하는 일본인은 기뻐하며 활발하게 경성 교외로 마중을 나왔다. 특히 청군 및 각국 군대에 앞서 입경한 것을 기뻐하였다. 이와 동시에 해군 부대는 경성을 철수해 각기 소속 군함에 승선하였다. (13) 이홍장의 낭패 우리 일본군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민활(敏活)하게 경성에 들어갔으므로 청국 공사 원세개는 크게 낭패하여 곧바로 본국 이백(李伯)에게 전보를 보내어 다시 출병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이 원세개의 낭패는 바로 이백에게 전해졌다. 어째서 이렇게 낭패했는가를 물었더니, 지난 1884년의 난에 청국은 2천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였지만 일본에서는 겨우 1백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번에도 결코 많은 군사를 보내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또 곧바로 경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백은 원세개의 보고를 듣자마자 바로 수하의 친병을 점검하고 출병 준비를 하였다. (14) 병력 수송선의 귀국 앞서 우리 군 병력을 태우고 인천으로 간 와카노우라마루(和歌浦丸)는 16일 오전 1시 30분 조선으로부터 바칸(馬關)에 도착하였다. 그 배가 알리는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무사히 12일 오후 2시 40분부터 4시 반까지 상륙을 마쳤다. (15) 일본군 파견의 증가 14일 우지나항을 출발해 히로시마의 현역병, 예비병 몇천 명이 히고마루(肥後丸)를 타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16) 주한 청군의 거동 1) 아산 주둔 청군의 수 청국 육군은 삼위병(三衛兵, 1,500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조사에 따르면 4위병(2천 명, 그렇지만 1위병은 5백 명 이상인 것도 있고 또 이하인 것도 있다고 한다) 즉, 총수 2,100명이다. 2) 청군 아직 경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산에 주둔하는 청군이 경성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자가 있으나 13일까지는 확실히 입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청군의 한 부대 강주(江州)로 향하다 13일 한 부대 500명 정도(1위병일 것이다)가 아산으로부터 십여 리 떨어진 강주로 향했다. 입경했다는 설은 아마도 이들을 잘못 본 것이리라. 4) 아산 청군의 난폭 아산에 주둔하는 청군은 동 지방의 감사에게 명령을 내려 민가로부터 양식 및 보통의 말[中馬]은 물론 금전에 이르기까지 징수하고 매우 난폭한 행동을 함에 따라 조선인이 크게 싫어하고 있다고 18일 통신이 전하였다. (17) 개전 준비의 소문 앞서 청국은 아산에 군사를 보낸 상태에서 일본이 출병하였다는 통지를 접하였으나 단지 16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는 소문이 있을 뿐으로 그 거동이 매우 불분명하였는데 19일자로 해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있었다. 초상국(招商局)의 기선은 선적(船籍)을 독일로 옮길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지난 1884년 청국 정부는 프랑스와 미리 준비하여 프랑스에 선전(宣戰)할 때 초상국의 기선을 미국 선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것이 개전의 첫 번째 순서일 것이라고 한다. (18) 오토리 공사 일본군 철수 요구를 거절 청국 공사 원세개와 조선 조정으로부터 일본군 철수의 요청이 있었는데 오토리 공사는 의연하게 과감히 거절하였다고 지난 20일 통신이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