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병제(兵制) 동학당에게 연전연패한 조선의 병제에 관해 모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국의 상비병이라는 것은 경성에 주둔하는 것으로 실제의 병력은 4천 명 정도가 될 것이며, 이를 4영(營)으로 나누어 1영의 병력 수는 천 5백 명에서 천 6백 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는 병사의 수당으로 관에서 급여를 받을 때의 기준이 되는 허수이며, 실제는 1영에 천 명 내외의 병사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실의 병력과 겉으로 보이는 총원의 차에 해당하는 병사에 대한 수당은 각 영의 상장관(上長官)이 사적으로 쓰든지, 분배하든지 어떻든 정당하게 지불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오(隊伍)의 편성은 10명으로 최하급의 조(組)를 구성하고 그로부터 두 배씩 늘려 이름을 바꾸어 대(隊)를 구성하고 점차 1영을 이룬다. 1영의 장(長)인 자의 권위는 매우 대단하지만 부대의 장수로서 재간과 기량은 전혀 없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므로 평소 병사의 조련 등은 우리 일본으로 말하면 조장(曹長) 정도 격식의 사람이 오로지 이를 맡는다. 미국인 데니 씨는 사범과 같은 지위에 있고, (조선인) 장교는 항상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호령을 내리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이러한 폐는 실로 계급이 올라갈수록 심하다고 한다. 평시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고 나아가 사기도 높지 않기 때문에 이들 장교와 병사로 적과 싸워 능히 적을 쳐부수는 것은 도저히 바랄 수가 없다. 하물며 이들 병사의 사범 역인 미국인 데니 씨는 과거 일본 고베(神戶)의 세관에 고용되었던 인물로 병사(兵事)에는 그다지 숙달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은 자의 솜씨는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총포는 4영 모두 미국제이고 제식(製式) 역시 동일하므로 이 점은 조금 볼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폭도 진무를 위해 이미 경성을 나간 약 3천 명의 병사 가운데에는 총기와 탄약을 적에게 빼앗긴 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그곳으로 건너가 그 나라 사람에게 조선의 병력을 물어보면, 도처에서 이곳에도 저곳에도 몇천 몇백 명의 부대가 있다고 제법 정말인 것처럼 대답하지만 실제의 병력 수는 아니다. 조선에서 과거의 병제는 둔전병(屯田兵)의 조직에 의해 매우 시의에 맞추어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번(藩)에는 토착 병사가 있었다. 수시로 징집 훈련하여 만일의 변고에 대비하였지만 세월이 흐르고 물정이 변하여 모처럼의 제도도 점차 이완되고 폐지되었다. 결국 실제 전투에 조금 쓸 수 있는 병사의 실제 수조차 매우 적고, 무기 역시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것들의 실제를 조사하고 실력을 키우는 일을 시도하는 자가 없다. 인습이 오래된 지금 또한 이를 고칠 수 없고 지역에 따라 장소에 따라 헛되이 수천 명의 병사가 있다고 과장되게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또 군, 부, 현 등 관아의 소재지에는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지만 일찍이 이를 열어 본 적이 없고 그 무기는 모두 녹이 슬어 겨우 그 형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나라의 장교가 이 나라를 만유(漫遊)할 때 이 무기고를 보기 위해 도처에 요청을 했지만 봉인한 상태로 전임자로부터 인계받는 것이 관례여서 지금까지 연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를 타국인에게 보여 주기 어렵다며 모든 관수인(管守人)도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따라서 장교는 창을 통해 몰래 내부를 엿보았더니 쓸 만한 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수영(水營)이라고 칭해 마치 우리나라의 진수부(鎭守府)와 같은 성질의 관서가 없지는 않지만 군함과 같은 것조차 한 척도 없는 정도이기 때문에 영소(營所)라는 것도 볼만한 것이 없다. 요컨대 오늘날 조선국에는 서양식으로 훈련한 병사 4천여 명이 있지만 경성에 주둔 중인 것은 지금 천 수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2) 오가와(小川) 서기생의 직화 이번에 귀국한 조선국 인천영사관 근무 서기생 오가와 모리시게(小川盛重) 씨는 고베에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번의 조선 사변에 관해 우리 일본의 각 신문을 읽어 보니 모두 동학당이 변란을 기도한 것처럼 기재하고 있지만, 대체로 이번 사변의 기인은 동학당에 있지 않고 지방의 농민들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전라도의 농민은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의 학정에 분노해 자주 정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감사의 경질을 희망하였고, 정부에서도 인민의 희망을 받아들여 김 감사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 인민의 불평을 풀려고 하는 내의(內議)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직 실행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에 앞서 인민은 정부에서 감사를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결의하고 이번 폭거를 기도한 것이다. 인민이 원한을 품고 지목하는 적은 감사 김문현 외에 전운총무관[轉運總務官, 중앙의 관리로 공미(貢米) 운반 등을 관장하는 (조필영(趙弼永) 및 관하 부사(府使)) 지방관으로서 감사 아래에 유사(留使)라고 하는 관리가 있고 그 아래에 위치하는 관명] 모(某) 3명으로 지금까지 이 세 명을 극형에 처하고 전라도 각지에 전시하자고까지 외칠 정도이다. 위의 양민이 폭발하자 감사 김문현은 곧바로 도주하고 그 아래에 위치하는 관아의 장관인 유사, 부사, 목사, 현감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도주하였고 감영(감사가 장인 관아의 이름)의 속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판임관(判任官), 고리(雇吏)와 같은 자는 재빨리 폭도 속으로 가담하였다. 또 동학당이 일어나 이것을 도와 마침내 이러한 큰일로 이르게 된 것으로 폭도의 종류를 나누어 보면 지방의 농민, 관리, 동학당의 세 종류라고 한다. 그 기인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인민이 희망하는 바는 학정을 벗어나 관정(寬政)으로 지배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며 결코 원대한 목적을 품은 것이 아니다. 경성을 함락하는 것은 꿈에서조차 그들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 동학당이 이번 기회에 오랫동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경성까지 함락하는 방책으로 나올지도 알 수 없다. 내가 인천에서 이세마루(伊勢丸)에 탑승한 것은 이번 달 4일 밤의 일로 그날까지 전라, 충청 양도를 민군(民軍)이 점령한 것은 사실이며 진무(鎭撫)를 위해 청국으로부터 군대를 보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기 위해 청국 영사를 방문하였으나 때마침 영사는 경성으로 상경해 부재중이어서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날 밤이 되어 청국으로부터 드디어 군대를 보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내가 출발 전에는 인천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매우 일이 없었으나 아마도 앞으로도 인천에 이변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라, 충청, 황해의 3도는 조선국 가운데 중요한 장소이며 일본 상인이 콩을 비롯해 기타 무역품 매수를 위해 들어가는 것은 모두 이 지방이기 때문에 앞으로 변란이 길어지게 된다면 일한 무역상에는 적지 않게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오가와 씨는 조선 현재 중앙정부의 각 관리 및 8도 감사의 성명을 각기 기재한 표를 보여 주었으므로 때가 때인 만큼 다음에 기재한다. 중앙관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 이판서(吏判書) 민영환(閔泳煥) 호판서(戶判書) 박정양(朴定陽) 병판서(兵判書) 이승오(李承五) 형판서(刑判書) 이정로(李正魯) 예판서(禮判書) 홍종헌(洪鐘軒) 공판서(工判書) 김학진(金鶴鎭) 외독(外督) 조병직(趙秉稷) 내독(內督) 민응식(閔應植) 좌포장(左捕將) 신정희(申正熙) 우포장(右捕將) 이봉의(李鳳儀) 호아사(扈衙使) 김환시(金煥始) 통아사(統衙使) 민영준(閔泳駿) 경리사(經理使) 동상(同上) 장아사(壯衙使) 이종건(李鐘健) 총어사(總御使) 한규설(韓圭卨) 해군통제사 민응식(閔應植) 총제사(總制使) 민영옥(閔泳玉) 우전총판(郵電總辨) 조병직(趙秉稷) 광무총판(鑛務總辨) 민영익(閔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