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부산발 통신) 포도청교(捕盜廳校) 탐정이 보고에서 말하기를 무장, 정읍, 영광, 장흥(長興), 태인, 옥과(玉果)에 모여 있는 무리는 낮에는 진법(陣法)을 조련하고 밤마다 도략(韜略)을 강독한다. 이 6개 읍의 장정은 합계 5~6천 명 정도이며 그중에서도 무장이 가장 많다. 각 읍은 약 20리마다 각기 의기(義旗)를 세워 1천여 명을 집단으로 삼는다. 대진하여 서로 싸울 때 그들이 먼저 흰 천의 장막을 두르면 관군이 아무리 대포와 소포를 발포하더라도 총탄의 파편이 어지러이 튕겨 나가 흰 천의 밖에 떨어진다. 이를 통해 관군이 항상 패배하는 것이 매우 이상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동도대장(東道大將) 군령(軍令)을 각 부대장에게 약속하는 듯하며 적을 대할 때 전투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의 공으로 삼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인명을 해치지 않을 것을 그다음으로 삼는다. 행군하여 지날 때 함부로 백성의 물건을 해치지 말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마을에는 10리(일본의 1리) 내에 주둔하지 말라고 한다. 동도 12류(東徒十二旒)의 군기 동도는 12개의 군기를 내세우며 항상 전진(戰陣)으로 향한다. 그 기장(旗章)은 항복한 자는 애무(愛撫)하라, 귀순한 자는 경복(敬服)하게 하라, 빈곤한 자는 구제하라, 탐하는 자는 내쫓으라, 간교한 자는 그치게 하라, 도주하는 자는 쫓지 말라, 거스르는 자는 효유(曉諭)하라, 빈곤한 자는 구제하라, 병든 자는 약을 주라, 불충한 자는 제거하라, 불효하는 자는 형벌을 주라는 12구절로 당도(黨徒) 가운데 만약 이러한 조항을 위배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감옥에 가둔다고 한다. 농공상민의 기쁨 조선의 농공상민은 간신과 학리(虐吏)의 징발을 두려워하여 남은 재산을 낭비하는 버릇이 있었으나, 이번 사변에 조우하자 그 사재를 동학당에 보내어 운동을 도와 민씨 정부를 전복하고 그 힘에 의해 재산의 안전을 꾀하려 한다며 이번 폭동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 백산(白山) 전투 백산 전투에서 동학당이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자세한 소식에 따르면 관군은 앞뒤 2군으로 부대를 나누어 진격을 시작했다. 전군은 적에게 포위당해 완전히 패배하였고 이 소식은 바로 후군에게 전해졌지만 더 이상 구원의 전망이 없고 도리어 자신의 부대까지도 위급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그대로 부대를 지휘하여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본영의 대장은 무사로서는 있을 수 없는 비겁한 행위라고 하며 크게 분노해 마침내 장교의 목을 쳤다고 한다. 대장이 이러한 처치를 한 것은 오히려 달리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결과는 도리어 반대로 나왔다. 막을 수 없는 위험을 피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잔혹한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면 단연코 출진하지 않고 처벌을 받는 편이 좋겠다고 불평을 드러내는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원세개 한왕(韓王)을 설득하다 청국이 원병을 보낸 일은 원세개가 한국 군주에게 권유한 결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문인데, 이번 달 1일 신보(申報)에도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원세개가 한왕에게 권유한 것을 온전히 공표하였다. 조선 전라도에 민란이 번갈아 일어난 것에 대한 신보의 글. 이에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기자[訪事人]의 서신에 따르면, “난을 일으킨 것은 작년 동학당과 관련되어 있다. 좌도의 술법에 능하여 두 진영이 서로 마주할 때에 저들이 낮은 소리로 중얼대며 주문을 외우면 적군의 창과 대포가 도리어 스스로를 공격한다고 하니, 이는 조선인들이 전해 들은 말이다. 국왕이 2일에 병사를 보내 토벌하려 하자 중국 상무총판 원세개도 차관 서방걸(徐邦傑)을 파견하여 조선군과 함께 가도록 했다. 이곳에 이르니 난을 일으킨 무리는 산을 등지고 진을 쳐서 군기를 누이고 북을 쉬고 있었고, 관군 역시 그 소굴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해 피차가 서로 대치하기를 보름 남짓이었다. 원세개가 누차 국왕을 알현하여 청군을 불러 진군하여 소탕할 것을 청하였으나 국왕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 의도를 미루어 살펴보건대, 대개 군사를 불러들이는 비용을 아끼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