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부산발 통신) 동학당의 조민문(弔民文) 5월 8일자로 동학당이 법성읍(法聖邑)의 이향(吏鄕)에게 보낸 통문은 다음과 같다. 명철하신 성상(聖上)께서 위에 계시는데 생민(生民)이 모두 도탄에 빠진 것은 무슨 이유인가? 민폐의 근본은 이포(吏逋)에 그 이유가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탐관(貪官)에게 그 이유가 있으며, 탐관이 법을 범하는 것은 집권자의 탐욕에 연유한다. 아! 혼란이 극도에 달하면 다스려지고 어둠이 변하면 밝음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이다. 지금 우리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어 어찌 관리와 백성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관리도 백성이니 각 공문부(公文簿)의 이포 및 민질(民疾)의 조항이 있다면 무릇 이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바로 합당하게 처치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가져올 것은 굳이 그 시각이 다름을 개의치 말라.(그 종이에 찍혀 있는 그림을 보니 수령의 도장인 것 같다.) 통문이 또 한 통 있다. 우리의 오늘 거사는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일동은 죽음으로써 맹서하였으니 두려워 동요하지 말라. 다만, 앞으로 이정(釐正)하려고 하는 것을 열거하면, 첫째로 전운영(轉運營)이 관리 및 백성들에게 폐단이 된 것, 둘째 균전관(均田官)의 폐단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폐단을 낳은 것, 셋째 각 시정(市井)에서 푼전[分錢]으로 세금을 징수한 것, 넷째 각 포구의 선주들이 강제 탈취한 것, 다섯째 타국의 암매상들에게 고가로 사들인 것[前貸], 여섯째 염분(鹽分)에 대한 시장세의 일, 일곱째 갖가지 물건을 도매로 팔아 이윤을 취한 것, 여덟 번째 백지(白地, 미간지)에 징세하고 송전(松田)에 기진(起陣)한 것 등 와환(臥還)의 발본에 대한 여러 가지 폐질(弊疾)을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이때에 이르러 우리 사농공상의 네 가지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위로 국가를 돕고 아래로 빈사상태에 있는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아니한가? 이성렬(李聖烈)의 서한 순창부사(淳昌府使) 이성렬이 민혜당(閔惠堂) 영준(泳駿)에게 보낸 서한에서 간략하게 말하기를, “4월 3~4일경 동도는 금구ㆍ태인 지방으로부터 물러나 부안ㆍ고부 등지로 향했습니다. 관군이 이를 쫓아 고부와 정읍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동도는 험한 승두산(僧頭山)에 의지하여 관군의 진로를 차단했습니다. 승두산은 그 모양이 복반(伏盤)과 같아 그들 무리는 산 위에 진(陣)을 펼쳤습니다. 외면에는 흰 천의 장막을 펼치고 흙벽을 쌓았고 안에는 묶은 짚을 설치해 그 안에 몸을 숨기고 발포하였습니다. 관군의 대열과는 동서로 불과 몇 궁(弓)의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지형은 조금 비탈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 자주 관군을 머리 위로부터 저격하며 사력을 다해 도전했습니다. 관군은 원래 오합(烏合)의 무리로 그들의 갑작스런 공격을 접하고 궤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살해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무리의 마음이 괴리(乖離)하여 병사의 사기가 갑자기 기운을 잃었습니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병사들이 쓸모가 없었으니 정말로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현재 그들 무리는 3~4천 명에 지나지 않지만 아마도 앞으로 점차 증가할 것입니다. 또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의 자산을 약탈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늙은이는 생활의 터전을 잃어 길에서 쓰러지고 어린아이는 도로에서 울면서 거의 갈 길을 헤맵니다. 어찌 잇달아 도적이 되지 않을 것입니까? 전도(全道)의 여러 읍(邑)은 이미 공허가 되었습니다. 만약 여전히 조정이 어루만져 진정시킬 방법을 세우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혜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역시 마침내 공을 이루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들은 부첨(符籤)을 가지고 사람을 꾀고 휘파람을 불어 당을 모읍니다. 양왜(洋倭)를 내쫓는다는 이름을 빌려 수령[守宰]의 탐람(貪婪)을 타이른다고 하면서 백성을 속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무리는 원래 왕법(王法)에서 그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병력이 의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어찌할 것입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방백(方伯)의 임면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학한 벼슬아치는 모두 징계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조세를 거두는 폐해를 완전히 교정해야만 합니다. 그런 뒤에 중심(衆心)을 달래야 할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급히 선무 특사를 파견하여 병(兵)을 통해 이에 임하고 의(義)로써 이를 타이르고, 은(恩)으로써 이를 달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저항한다면 바로 천주(天誅)를 가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런 뒤 군대가 피를 흘리지 않고 적괴(賊魁)를 포획해야 할 것입니다. 저 무리는 원래 궁한 적을 급히 추격한다면 그 세력이 더욱 단결하여 풀기 어렵고 완만하게 하면 교만하게 사나워져 복속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를 무엇보다 헤아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기(軍器)는 약탈당해 남은 물품이 없어 적이 다시 석권하여 온다면 우리 이 열읍(列邑)을 어찌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도정(道程) 점령지 및 재류 일본인 ○ 경성에서 전라도 각지에 이르는 거리 전주(全州) 40리 16정(丁) 영광(靈光) 63리 4정 나주(羅州) 66리 24정 금산(錦山) 2리 20정 제주(濟州) 육로 83리 20정 광양(光陽) 72리 16정 수로 86리 8정 광주(光州) 64리 부안(扶安) 50리 24정 순천(順天) 68리 16정 김제(金堤) 47리 4정 여산(礪山) 38리 흥덕(興德) 56리 익산(益山) 40리 고창(高敞) 56리 32정 영암(靈嚴) 72리 32정 흥양(興陽) 79리 4정 진산(珍山) 40리 대정(大靜) 제주에서 10리 24정 창평(昌平) 62리 8정 무안(務安) 70리 8정 임피(臨陂) 43리 20정 용안(龍安) 37리 12정 능주(綾州) 66리 24정 곡성(谷城) 59리 20정 장흥(長興) 79리 4정 무장(茂長) 59리 20정 장성(長城) 59리 20정 해남(海南) 80리 보성(寶城) 75리 20정 화순(和順) 67리 20정 고부(古阜) 53리 12정 옥과(玉果) 58리 24정 ○ 경성에서 충청도 각지에 이르는 거리 충주(忠州) 24리 32정 회인(懷仁) 31리 4정 공주(公州) 28리 16정 청양(靑陽) 28리 16정 청주(淸州) 25리 28정 회덕(懷德) 30리 8정 홍주(洪州) 26리 24정 은진(恩津) 35리 20정 임천(林川) 35리 20정 노성(魯城) 32리 32정 태안(泰安) 34리 24정 석성(石城) 34리 24정 서주(舒州)26리 24정 아산(牙山) 18리 24정 단양(丹陽) 32리 33정 청풍(淸風) 30리 8정 한산(韓山) 39리 4정 은진(恩津) 35리 20정 오천(汚川) 27리 20정 연산(漣山) 동 천안(天安) 18리 24정 진천(鎭川) 21리 12정 옥천(沃川) 36리 16정 결성(結城) 27리 20정 괴산(槐山) 24리 32정 목천(木川) 21리 12정 대흥(大興) 24리 32정 연기(燕岐) 25리 28정 서산(瑞山) 31리 4정 비인(庇仁) 37리 12정 문의(文義) 29리 12정 영춘(永春) 41리 28정 보은(報恩) 33리 28정 전의(全義) 21리 12정 홍산(鴻山) 26리 16정 보령(保寧) 31리 4정 직산(稷山) 16리 영동(永同) 41리 28정 부기) 경성에서 인천까지는 4리 16정, 부산까지는 88리 32정, 원산까지는 130리 8정이다. ○전라도의 점령지 동학당이 전라도에서 점령한 지구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나주(羅州) 수비병 800여(경성까지 66리 23정) 광양(光陽) 동 1,100여(동 72리 16정) 부안(扶安) 동 200여(동 50리 24정) 흥덕(興德) 동 1,040여(동 56리) 고창(高敞) 동 600여(동 56리 32정) 익산(益山) 동 800여(동 40리) ○조선 재류의 일본인 관계 부처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조선에 재류하는 일본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남 여 호수 경성 498 325 미상 1893년 12월 말일 조사 원산 487 307 동 동 부산 2,584 2,060 980 1894년 3월 말일 조사 인천 1,543 1,021 427 1894년 4월 말일 조사 합계 5,112 3,713 1407 ○동학당 진정(鎭定)의 허황한 설 지난 6월 20일 전후 잇따른 보고에서 말하기를 전주를 회복하여 동학당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은 지금까지도 여러 번 있었던 일로 이것은 조선 정부의 18번이다. 그 심사를 살펴보면 경성에서는 자주 표면적으로 무사함을 가장하려 하고 있다. 전주 함락 후 한 번도 관군이 동학당과 싸웠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전주를 회복하였다는 이치를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니 지금 농사가 모내기를 한창 하고 있는데 동학당의 과반수는 농민이므로 일시적으로 검을 버리고 호미를 잡았기 때문에 휴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휴전을 가지고 완전히 진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다름이 아니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구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혹은 일반 인민을 달래기 위함일까. 요컨대 진정되었다는 것은 허황한 설이다. ○중국선 이적(移藉)과 독일국 청국 초상국(招商局)의 기선이 선적을 독일로 옮길 것이라는 말은 전에 전해 들은 바가 있는데 과연 이 설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일개 개인 회사와의 교섭인가, 장차 독일국 정부와의 교섭으로 이어질 것인가. 이러한 시기에 독일국이 이 신청을 승인할지 여부는 무엇보다 우리 국민이 독일국의 거동을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이다. ○청국의 두 번째 출병 6월 22일 운송선 두 척이 태고(太沽)를 출발해 조선으로 향했다. 그 병력 수는 4백 명이라고 한다. ○청 황제 출병을 재가하지 않다 청국의 늙은 재상 이홍장(李鴻章)은 개전 준비에 급급하여 거의 선전포고를 하려고 하는 기세로 전에는 다수의 군대를 보내려고 하는 듯이 흥분했는데 지금은 불과 4백 명뿐이다. 이것은 청 황제의 재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6월 24일 북경발 전보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민영준 파면되다 조선 조정에서 가장 세력을 차지하고 위세와 권력이 대단하였던 통영대장 민영준은 이번에 원세개와 모의해 마침내 중국군의 지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조선 조정의 칭찬하고 비방하는 말은 모두 민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는데 26일발 전보에 따르면 갑자기 그 직에서 파면되었다고 한다. ○청국 정부의 결심 청국 정부가 이홍장의 개전책을 거절하고 굳이 재가해 주지 않은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데 이번 달에 이르러 지난 3일의 보고에 따르면 마침내 이홍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병을 재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홍장은 곧바로 7천 5백 명의 병사를 출발시켜 평양으로 향하게 했다고 한다. 또 보고에서 말하기를 이번에는 별도로 만주의 군대를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거동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결의 우리 일본 정부는 단연코 각국 정부의 중재를 거절하고 만일 그들이 무례한 거동을 할 때에는 용진(勇進)하여 우리 제국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온 무용(武勇)을 세계의 이적(夷狄)들에게 보임으로써 우리나라의 무용이 옛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군대의 준비가 어떠한지 말하기를 50만 명의 군세는 당장 소집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르는 무기와 탄약은 이미 준비되어 순조롭게 갖추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단호하게 청ㆍ한 양 정부로부터 출병의 이유를 조회하고 또 철병 요구가 전후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미 지난달 22일에 어전회의를 궁중에서 열어 아리스가와미야(有栖川宮) 참모총장, 고마쓰미야(小松宮) 근위사단장 양 전하를 비롯해 이토(伊藤) 수상 이하 각 대신, 야마가타(山縣) 추밀원의장, 가와카미(川上) 참모차장, 나카무타(中牟田) 군령부장도 열석하였고 마쓰카타(松方) 백작도 급하게 불려와 참여하여 대한, 대청의 요건을 논의하였다고 하므로 그 회의의 결과는 동양의 천지를 진동할 것이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토리(大鳥) 공사의 담판 지난 6월 26일 오토리 공사는 조선국 궁성에 등청하여 국왕을 배알하고 자세히 우리 제국이 출병한 이유를 상주하였다. 또 귀국이 청국의 속방(屬邦)인 것을 감수하고 묵인하는지 그 여부를 날짜를 정해 회답하기 바란다. 과연 청국의 속방임을 승인한다면 만국에 솔선하여 귀국이 독립국이라는 것을 승인한 우리 일본제국은 이번에 귀국에 대해 단호한 처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을 진술하고 퇴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30일 외무독판 조병직(趙秉禝) 씨를 통해 우리 조선국은 순수한 독립국으로 결코 청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내용을 오토리 공사에게 회답했다고 한다. 조선국이 독립국인지 아니면 속국인지는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의심스러워 한 점인데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 아니라는 점이 이로써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원세개 공사 출병비를 요구하다 조선 정부가 우리 오토리 공사에 대해 자국이 순수한 독립국이며 결코 청국의 속방이 아니라는 것을 회답하자 이와 동시에 청국 정부를 향해서도 조선국은 독립국이며 결코 귀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통보하였다. 이에 청국 공사 원세개는 청국 정부의 뜻을 받아서 조선이 과연 순수한 독립국이며 우리 청조의 속국이 아니라고 한다면 전에 조선의 청구에 응해 우리 청국으로부터 출병한 일체의 비용을 변상해야 한다는 청구를 하겠다고 한다. 청국인의 심사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청한의 관계 우리 오토리 공사가 단도직입적으로 조선 정부가 과연 독립국인지 청국의 명령 아래에 좌우되는 속국인지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결코 청국의 속방이 아니라고 굳세게 회답하자 오토리 공사는 더 나아가 조선 조정의 여러 신료들을 향해 폐정의 일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그 방법도 자세히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청국 공사 원세개는 어디까지나 종래의 방침을 취해 우리 오토리 공사의 요구에 반대하고 조선 조정 내부로 들어가 온갖 수단을 다해 여러 가지 종류로 이간하고 짓궂은 모의를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조정 안에서는 개화당이라는 자들의 세력이 매우 번성하여 사대당의 주장에 찬성하는 무리는 전전긍긍하며 감히 우리 공사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고 심하게는 병을 칭하여 입조(入朝)하지 않는 자도 있다고 한다. 청국군이 대거 들어와 경성 내외의 산하를 메울 때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조선 조정의 내외는 모두 개화당이라는 상황이라고 한다. ○엄정중립을 지키는 나라 만일 일청 양국이 다투게 된다면 프랑스, 독일 등은 엄정중립을 지킬 것이지만 다른 두 강국은 아직 그 의향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러시아와 영국 러시아와 영국은 동양 문제에서 서로 적대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두 나라는 결국 서로 대치할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두 나라는 모두 아직 의향을 공표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러시아의 거동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 밖에 있다는 소문이 자주 있다. ○미국의 엄정중립 미국 공사는 어제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본국 정부 국무경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훈령을 오토리 공사에게 전달했다. 그 요지를 말하면, 만일 일청 사이에 일이 발생하면 국외중립을 엄수할 것이다. 또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도 평화로이 사태를 해결하기 바란다는 희망을 표했다. 라고 한다. 그리고 미국 공사는 영사와 논의해 일청이 개전할 경우에는 거류하는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거류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의향을 물었더니 다수의 의향은 일단 나가사키로 가서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따라서 동 공사는 그 뜻을 본국에 전보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인쇄 1894년 7월 17일 발행 도쿄시(東京市) 교바시구(京橋區) 모토지마쵸(元島町) 6번지 편집발행 겸 인쇄자 오카다 쇼베(岡田庄兵衛)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區) 신이즈미쵸(新和泉町) 1번지 인쇄소 긴코도활판소(今古堂活版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