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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조선폭동실기 朝鮮暴動實記
일러두기

본편(本篇)은 하루아침에 계림(雞林)의 난이 일어나자 특별히 통신원을 해당 지역에 파견해 여러 가지 보도를 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 자료가 대체로 산을 이루어 도저히 모두 작은 책자에 기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쳐 소홀히 할 수 없는 긴요한 소식만을 게재하는 것으로 하였다. 부디 조잡함을 나무라지 마시라. 편자 적음. 이번 조선의 소란에 관해 확신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접수한 소식에 의해 그 소란의 기인(起因)을 다음에 열기(列記)한다. 고부의 지세 고부군(古阜郡)은 28개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토호(土豪)가 많다. 토지는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해 줄포(茁浦), 염소(鹽所), 동진(東津), 사포(沙浦)의 네 항구로 선적 출하한다. 인천, 부산과의 관계가 매우 옅은 지역이지만 팔도 가운데 중요한 곳이다. 고부의 군수 성은 조(趙)요, 이름은 병갑(秉甲)이라 칭한다. 함경도 방곡령을 통해 그 이름이 알려진 조병식(趙秉式)의 조카이다. 군수의 실정 지난해 가을 고부 지방은 풍작이었는데 조병갑이 갑자기 방곡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과 가깝고 친한 자에게 명하여 쌀 수천 석을 매수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게 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한 조미(租米) 징수 때 제멋대로 학정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0월경에는 이미 민심이 움직이려는 조짐이 있었다. 동진강 부근의 봉기 음력 갑오년 정월 10일(양력 2월 15일)의 일이었다. 새벽 닭 소리와 함께 동진강 주변에 5백 명의 세력이 모였다. 각기 죽창을 들고 흰색 두건을 머리에 감았다. 나이는 14~15세로 보이는 소년 수령을 비롯해 부하 모두 도보 맨발로 군수의 성문으로 난입해 그 침소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조병갑의 도망 이로부터 조병갑은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 단신으로 도망쳐 정(鄭)의 집으로 가서 구호를 청했다. 정 모는 고부군의 명족(名族)이다. 이리하여 조병갑은 복장을 바꾸어 입고 정읍으로 도망가 마침내 전주 감영[完營]으로 들어갔다. 조병갑은 감사와 모의해 병사 1천 명을 빌려 난민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감사가 받아들이지 않자 곧바로 조정에 보고하고 그 지휘를 기다렸다. 이때 난민에 가맹한 촌락은 이미 15곳이고 전군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난민의 세 수령 전명숙(全明叔), 정익서(鄭益瑞), 김 모(金某)[세 명의 성명에는 의문이 들지만 잠시 이대로 둔다]를 말한다. 그리고 전명숙이 최상위에 있고 정익서와 김 모 두 명이 이를 보좌하는 것 같다고 한다. ●경성의 군비 경성에는 미국 군관 두 명이 교련하는 서양식 상비군 5천 명이 있다. 그 안의 2개 연대는 레밍턴 라이플을 휴대하고 별도로 케셜링 포와 크루프 포 1문을 갖춘 포병대가 있다고 한다. ●조선의 무관제도 조선의 관제는 동서 양반으로 나뉘어 동반(東班)을 문관으로 하고 서반(西班)을 무관으로 삼는다. 문관을 주로 하고 무관은 이에 부수(附隨)되는 것 같다. 양반 모두 위계를 정(正)ㆍ종(從) 9품으로 나누어 서반에는 또 육군과 수군이 있다. 병마절도(兵馬節度)는 일본의 사단장, 수군통어사(水軍統禦使)는 일본의 진수부사령관(鎭守府司令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문관인 팔도의 관찰사가 겸직하고 있으므로 관찰사는 1도(道)에서 병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1도에 수륙(水陸)을 합쳐 평균 60~70명의 장교, 1천 명의 병졸(전국에 대략 1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모두 예식상의 관제 인원이어서 신빙할 수 없다. 또 군용선은 전선(戰船), 방선(防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으로 분류하여 전라도에는 합계 223척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나뭇조각으로 못을 대용(代用)하고 판자를 조합한 것으로 몇 번의 사역(使役)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현재 조선의 내란 시기에 그 군비의 일단(一端)을 제시하면 이와 같다. ●동학당 경성으로 들어가는 진로 동학당이 경성으로 들어가려는 진로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석성(石城)으로부터 공주[公州, 충청도의 수부(首府)로 감사가 있는 감영(監營)이 있다. 병사 45명이 주둔한다]로 나가 금강(錦江)을 건너 온양(溫陽), 풍성(豊城), 천안(天安), 직산(稷山), 진위(振威), 수원(옛 왕성), 용인, 과천, 시흥의 각 비읍(鄙邑)을 거쳐 한강 연안으로 나와 마포 혹은 용산을 건너 곧바로 남대문으로 향하는 길을 취하는 것보다 달리 편리한 길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전했듯이 관군은 이 가도가 이어지는 천안에서 동학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학당 대장의 호령 동학당의 대장이라고 하는 이씨는 최근 각 부대장에 대해 훈령하였다. 지금 그 12조의 군호(軍號)를 들어 보니 다음과 같다. 항복한 자는 애무(愛撫)하라 귀순한 자는 경복(敬服)하게 하라 빈곤한 자는 구제하라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주라 탐하는 자는 내쫓으라 간교한 자는 그치게 하라 가난한 자는 진휼(賑恤)하라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불충한 자는 제거하라 불효하는 자는 형벌을 주라 위의 각 조는 우리의 근본이므로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지옥에 가두겠다고 하였다. ●노장군 적도 가운데 한 명의 노장군이 있다. 성은 박(朴)씨이고 나이는 87세 이다. 처음에 영암군에서 자제의 교육을 직업으로 삼아 군민의 존경이 상당했는데 군수 민씨의 학정이 날로 심해졌다. 혹은 남의 처를 범하고 또는 묘령의 여자를 빼앗아 첩으로 삼고 무명(無名)의 세금을 부과하고 무고한 자를 죽이는 등 그 광포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박은 백성의 질고(疾苦)를 묵시할 수 없어서 하루는 성의를 다해 민(閔)의 잘못된 정치의 개량을 권했지만 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박씨를 심하게 욕보였다. 그 때문에 박씨는 왈칵 성이 나 군수의 관청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저 군민을 모아 군수와 문답한 사정을 알리고 지금부터 해야 할 방책은 무엇인가 협의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온화한 수단을 취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많아 결국 군사를 일으켜 군수를 죽이고 마침내 현 정부를 토멸하고 나아가 좋은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박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곧바로 봉기를 일으켜 관청으로 몰려가 민을 붙잡아 처단하고 군신(軍神)을 제사했다. 그로부터 인접한 각지를 휩쓸고 마침내 동학당과 결탁해 출몰이 변화무쌍하여 지금은 동학당 한쪽의 대장이 되었다. 획책하여 맡지 않는 바가 없고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적이 없어 용감한 품평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젊은 장군 적중에 한 명의 소년 장군이 있다. 성은 장(張)씨이고 나이는 불과 14살이다. 광양 출신으로 그 아버지는 원래 상당한 관직에 있었던 자라고 하는데 현 조정에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전부터 포학은 망국의 근원이라며 상관과 심하게 다투어 죄를 받아 투옥되었는데 슬프고 분한 나머지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장(張)은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 향당을 모아 난을 일으켰는데, 이 역시 지금은 동학파의 일부의 장수로 용맹한 이름이 높아 전도(全道) 이르는 곳의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적 안에 귀신 있다 적중에 용맹한 장수 한 명이 있다. 여러 관군이 그를 귀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날개 없이도 하늘을 잘 나는 자로 도처의 싸움에 출진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그는 사격에 매우 뛰어나 자주 적의 대장을 죽일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총포와 화살을 무디게 하고서 큰 칼을 휘둘러 적진에 침입해 닥치는 대로 베어서 쓰러뜨려 순식간에 시체가 쌓이게 한다. 그러므로 그가 지나는 곳은 적이 없어 귀신이라는 이름이 결코 이유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 맹장에 관해 관군 안에 유포된 소문 가운데는 무엇보다 놀랄 만한 것이 있다. 즉, 그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흰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그 꾸밈은 완전히 동학파와 같지만 사실은 일본인이라고 한다. (아울러 기술하면 적중에 일본인이 섞여 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들은 바이며 특히 위와 같은 소문도 있기 때문에 우리 회사의 재한 탐방원은 그곳에 있는 공사관 및 영사관에게 그 허실을 문의하고 또 본사에서도 관계된 곳에 손을 써 충분히 탐구를 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도(賊徒)의 일이기도 해서 과연 어떠한 인물이 그 안에 섞여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인연도 없는 조선의 내란에 제국 인민이 참가할 리가 없다는 추측에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할 뿐이고 원래 확실히 이러한 일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해당 지역은 끊임없이 우리 행상인 약 20명쯤이 들어가 있는 곳이고 또 해당 지방에는 자주 우리 어업자도 왕래하여 두세 명의 무뢰한도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므로 더욱 그 허실(虛實)을 판단하기 어렵다. 혹은 이것이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자손이라고 칭하는 조선인일 것이라고도 말한다. 소문이 구구하여 지금 사실의 진상을 알 방도는 없다. ●초토군 안에 중국인 있다 최근 조선으로부터 돌아온 자의 말에 따르면 조선 정부에서 파견된 초토사가 이끄는 부대 안에는 중국의 수병(水兵)이 포함되어 있다. 14~15명씩 2개 조로 나뉘어 상당한 지휘관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다나카 지로(田中次郞)의 사람됨 동학당 안에 일본인 다나카 지로라는 자가 있다. 지금 이자를 아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자는 군마현(群馬縣) 마에바시(前橋) 사람으로 제1기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래 승진하여 육군 대위가 되었다. 감군부(監軍部)의 전령사에 임명되어 중국어 및 프랑스어에도 능통하고 담력이 있어 굳세고 의젓하지만 품행이 불량한 데다가 부채 때문에 군인의 면목을 더럽히는 소행이 있었으므로 4~5년 전 마침내 관직을 면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매우 낙담하여 도쿄 호텔의 심부름꾼이 된 적도 있었는데 3~4년 전부터 조선 내지로 들어가 어떤 상점의 지배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조선 재류의 일본인 계림(雞林)의 정세가 다시 급박해졌다. 이러한 안위가 관심을 받는 곳에 우리 동포는 얼마나 있는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인천(1893년 12월 현재 외무성 조사) 호수 426호 인구 2,504명 남자 1,530명 여자 974명 부산(9월 현재) 호수 975호 인구 4,550명 남자 2,487명 여자 2,063명 원산(6월 현재) 호수 172호 인구 764명 남자 485명 여자 279명 경성(1892년 말 현재) 인구 741명 합계 호수 1,573호(경성을 제외)인구 8,559명 이상은 관부(官府)가 조사한 것으로 확실한 것이지만 이후 약간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증가한 것은 분명하며 또 재류처가 정해진 사람 외에 일시 재류한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위의 숫자보다는 다소 많다고 보아도 좋다. ●농공상고의 기쁨 조선에서 관민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은 문명 인사가 상상할 수 없는데 특히 관리는 권위를 통해 부요한 농공상고(農工商賈)의 자재(資財)를 징발하여 자신의 주머니 속을 채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농공상고는 재산을 모을 마음이 부족하고 그렇지 않고 재산을 모을 필요를 느끼더라도 간신과 잔악한 관리의 징발이 두려워 여유 재산을 낭비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동학당이 일어나자 농공상고는 그 모아 놓은 재산을 바치고 운동을 도움으로써 민씨 정부를 전복하고 지금 재산의 안고(安固)를 꾀하여 이번 폭동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설학(說學)의 조선 사족 동학당이 맹위를 떨치는 것은 이미 숨길 수 없는 사실인데 이전에 1882년의 변란에서 민씨 일족[閔族]의 죽임을 면해 함경도로 탈주한 1천여 명의 사족이 동학당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족의 무리는 군사에 정련(精鍊)한 자가 많아 칼, 창, 총포의 사용에 익숙할 것이기 때문에 범상치 않은 큰일이라고 해서 민씨 일족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 현재 그 방면에 간첩을 보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아카시마루(明石丸) 편으로 경성으로부터 이곳의 어느 사람에게 도착한 서신의 내용에서 확인하였다. ●영광(靈光) 적 진영의 군령장(軍令狀)과 계군령(戒軍令) 영광을 점령한 적도는 먼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각지의 도당과 기맥을 통하고 마침내 경성을 공격하기 위해 미리 여러 군대에 대해 계군령과 군령장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군령장 동도대장(東道大將)이 각 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책(約策)한다. 무릇 적을 대할 때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이 으뜸의 공(功)이다. 어쩔 수 없이 싸운다 하더라도 절대로 인명을 해치는 일이 없음을 귀한 것으로 한다. 행진(行陣)을 할 때에는 절대로 남의 물건을 해치지 말라. 효제충신(孝悌忠信)하는 자가 있는 마을에는 10리 이내로 주둔하지 말라. ◎계군령 항복한 자는 애무(愛撫)하라 귀순한 자는 경복(敬服)하게 하라 빈곤한 자는 구제하라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주라 탐하는 자는 내쫓으라 간교한 자는 그치게 하라 가난한 자는 진휼(賑恤)하라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불충한 자는 제거하라 불효하는 자는 형벌을 주라 ●청국 출병의 목적 여하 거류 인민의 보호와 동학당 정벌을 위해서라면 5백에서 6백의 병사를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인데 수천 명의 병사를 파출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달리 깊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도 한다. 기자는 지금 이러한 말에 대해 갑자기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어쨌든 동학당에는 유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설도 유포되어 완전히 근거가 없는 소문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정도 있다. 위기일발 혹은 동양의 대란을 야기하는 것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이기 때문에 이번에 청국의 일거일동은 일본인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 출장의 청군 저 이홍장 씨가 관할하는 위해위(威海衛) 및 대고(大沽) 주둔병으로 모두 서양식 훈련을 받은 자이다. ●조선 내란의 별보(別報) 하루아침에 동학당의 반란 깃발이 펄럭이자 정세를 보고 와서 호응하는 자가 많다. 연전연승하여 거의 일사천리의 기세로 전라도 대부분의 요소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지금 고부, 석성 등에서 양군의 세력을 살펴보니, 적군은 밤낮으로 그 세력을 늘리고 관군은 밤낮으로 그 세력이 줄어드는 상태로 도저히 관군의 승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적군은 지방 부상(富商)과 호농(豪農)이기 때문에 많은 금곡(金穀)을 저장하여 군량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 단지 곤란한 것은 군기(軍器)의 파손을 보수하기에 방도가 없는 일과 그 부족을 보완하는 방책이 없는 일인 것 같다. 단, 군 안에는 목수 등 기술에 정교한 자도 있어서 목포(木砲)와 활ㆍ화살 등은 자유자재로 제조한다. 또 알려진 돌을 던지는 투력술(投礫術)에 뛰어난 자 70여 명이 한 몸이 되어 접전할 때는 반드시 먼저 나서 관군을 괴롭히는 것인데 그 기술이 교묘하여 40칸(間) 이내의 거리에서는 백발백중으로 그르치는 일이 없다. 실제로 석성의 접전에서는 30여 명의 관군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또한 그 전투부대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포총대(砲銃隊) 창대(鎗隊) 궁대(弓隊) 투력대(投礫隊) 척후대(斥候隊) 기병대(騎兵隊) 치중대(輜重隊) 이 밖에 회계, 양식, 의사 등의 준비가 충분하여 이를 관군과 비교한다면 여러 배 우수하다고 한다. 또 여기에 일종의 괴이한 이야기가 있다. 즉, 동학군의 맹렬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신출귀몰함은 실로 불가사의한 환술(幻術)과 요계(妖計)를 부린 것이니 완전히 신령과 부처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의 선봉 진영에는 언제나 그림자 같고 또 연기 같은 한 명의 장군이 나타나 군선(軍扇)을 들고 동학군을 지휘하고 진퇴시킨다. 실로 아지랑이나 번개와 같으니, 이러한 것은 신령과 부처가 아니라면 저 김옥균의 영혼일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괴담과 요언(妖言)이 전해진다. 심하게는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야간을 틈타 적군의 진지로 가서 비계(祕計)와 밀모(密謀)를 주어 진퇴를 시킨다고 하는 소문조차 있다.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우리나라의 세이난전쟁(西南戰爭) 때와 마찬가지로 노인과 어린아이,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전쟁의 소문뿐으로 시간이 지나고 있다고 한다. ●적도(賊徒) 정 모(鄭某)를 내세워 왕으로 삼다 이씨의 세상이 5백 년이 되어 끝날 것이라는 것은 조선 전국에 유포된 참어(讖語)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씨가 왕위에 오른 지 바로 503년이 지났다. 더구나 기강이 위로는 해이하여 정령(政令)이 올바르지 않고 아래로 풍교(風敎)가 흩어지고 인심이 부패하여 상하가 단지 사리(私利)가 있음을 알고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이씨가 망하고 다른 사람이 이에 대신할 때가 아닌가. 이것은 잠시 누구의 마음에도 떠올리기 쉬운 망상일 것이다. 하물며 난을 일으킨 이래 사방을 풍미하고 도당을 모으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향하는 곳에 적이 없고 싸워서 승리하지 않음이 없는 적도들은 어떻게 이 기세를 틈타 저 참언(讒言)을 실현하려 하지 않을까. 즉 충청도의 어느 곳에 살면서 때를 기다린 정씨(鄭氏)의 원손(遠孫) 모(某)를 세워서 왕으로 떠받들어 최시후(崔時厚) 이하 주요한 당원은 피를 마시고 신하의 약속을 하여 더욱 분발하여 관군에게 맞붙어 마침내 왕위를 장악하려고 노력하기에 이르렀다. ●적도의 격문 이때 적의 기세는 전국에 떨쳐져 가는 곳마다 저들이 주둔하지 않는 지방이 없기에 이르렀지만 단지 무장 부근의 결합이 조금 견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의례대로 세객(說客)을 파견하여 도당을 모아 다음의 격문을 발포하여 사방의 찬동을 구하였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니, 군신과 부자는 인륜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충성하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를 다한 후에 가정과 국가가 성립되고 무궁한 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롭고 신명(神明)스럽고 슬기로우시니 현명하고 정직한 신하들이 옆에서 돕는다면, 요순(堯舜)의 교화와 문제(文帝)ㆍ경제(景帝)의 치적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들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봉록과 직위만 탐내며 성상의 이목을 은폐하여 뜻을 맞추고 얼굴로는 아첨하면서 충성스럽게 간하는 사람의 말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고 일컬으니, 안으로는 보국(輔國)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만 많다. 백성의 마음은 날마다 변하여 집에 들어와도 살아갈 만한 직업이 없고 밖에 나가면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虐政)은 날로 심해지고 원성은 계속 일어나,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도리와 상하의 분별이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고 있다. 관자(管子)는 ‘사유(四維)가 시행되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를 보면 옛날보다 더 심하다. 공경 이하로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않고 자기 몸을 살찌우고 자기 집을 윤택하게 할 계책만 생각하고, 인재를 뽑는 곳을 돈이나 생기는 길로 알고, 과거시험장은 온통 교역하는 시장 바닥으로 생각하여, 허다한 재물을 국고에 들여놓지 않고 도리어 사복(私腹)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 보상할 것이 누적되어 있어도 그것을 갚으려고 생각지는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하고 방자하여 꺼려 하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팔도의 만백성은 짓밟혀 도탄에 빠지고, 지방 장관[守宰]의 탐욕과 학정도 참으로 그대로 있으니 어찌하여 이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근본이 깎이면 국가도 쇠퇴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은 생각지 않고, 외부에다 공경의 집과 같은 저택을 지어 자기만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한갓 작록(爵祿)만 탐하고 있으니,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에 묻힌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땅에서 생산된 옷을 입고 있으니 국가가 위태롭게 된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팔도의 백성이 한마음이 되고 억조창생이 모의하여 지금 의기(義旗)를 들고 공익에 보답하고 국가를 보존하며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목숨을 걸고 맹세하는 바이다. 오늘의 이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제각기 생업에 종사하라. 우리 다 함께 태평한 시대가 되어 성화(聖化)에 흠뻑 젖는다면 매우 행복할 것이다. ●경성과 각지의 거리[일본 이정(里程)] 충주(忠州) 24리 32정 공주(公州) 28리 16정 청주(淸州) 25리 24정 홍주(洪州) 26리 24정 임천(林川) 35리 20정 태안(泰安) 34리 24정 서주(舒州) 26리 24정 단양(丹陽) 32리 33정 한산(韓山) 39리 4정 오천(汚川) 27리 20정 천안(天安) 18리 24정 옥천(沃川) 36리 16정 괴산(槐山) 24리 32정 대흥(大興) 24리 32정 서산(瑞山) 31리 4정 문의(文義) 29리 12정 보은(報恩) 33리 28정 홍산(鴻山) 26리 16정 직산(稷山) 16리 회인(懷仁) 31리 4정 청양(靑陽) 28리 16정 회덕(懷德) 30리 8정 석성(石城) 34리 24정 노성(魯城) 32리 32정 청풍(淸風) 30리 8정 아산(牙山) 18리 24정 연산(漣山) 35리 20정 은진(恩津) 35리 20정 결성(結城) 27리 20정 진천(鎭川) 21리 12정 연기(燕岐) 25리 28정 목천(木川) 21리 12정 비인(庇仁) 37리 12정 영춘(永春) 41리 28정 전의(全義) 21리 12정 보령(保寧) 31리 4정 영동(永同) 41리 28정 ●경성의 인구 동학당이 드디어 경성으로 압박해 오려는 지금 동부(同府)의 인구를 기록하는 것도 역시 독자의 참고가 될 것이다. 다음은 올해 3월에 조사한 것이다. 조선인 약 40만 명 일본인 남자 492명, 여자 324명 중국인 약 2,500명 미국인 남자 29명, 여자 29명 영국인 남자 11명, 여자 3명 프랑스인 남자 6명, 여자 4명 독일인 남자 3명 러시아인 남자 2명, 여자 2명 덴마크인 남자 1명 ●길림(吉林)의 폭동 천진(天津)으로부터 부하(府下)의 모처에 도달한 전보에 따르면 최근 한ㆍ러 국경에 접하는 길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 도당(徒黨)은 약 1만 5천 명에 달하고 세력이 매우 창궐하므로 천진에서 그곳을 향해 군대를 보내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과연 진위는 어떠한가. 1894년 6월 16일 인쇄 1894년 6월 19일 발행 도쿄시(東京市) 간다구(神田區) 다시로쵸(田代町) 9번지 오카다 쓰네사부로(岡田常三郞) 댁내 편집 인쇄 겸 발행자 다카하시 도모타로(高橋友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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