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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아선각지사기전 東亞先覺志士記傳
일러두기

1882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조선사변은 일본의 민심을 몹시 자극했고 그 이후에는 일본의 지사(志士)로서 대륙에 뜻을 둔 자가 연이어 조선으로 건너갔다. 1892~1893년경에는 그 수가 점차 증가해 동지가 함께 건너가는 자들도 있고 외로이 표연하게 나선 자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특별히 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렁차게 풍운의 시기를 이용하려는 뜻에 있어서는 모두 하나였다. 그러한 지사가 의기투합하여 하나의 집단을 이룬 것이 1893년 8월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산박(梁山泊)이다. 이 무리는 나중에 일청전쟁의 동기가 되었던 동학당을 도와 조선 삼남의 천지를 진동시켰던 천우협(天佑俠)의 기초를 이루었다. 양산박 동지들 이 양산박은 오사키 마사요시(大崎正吉)가 동지의 생활 방편으로 시작한 법률사무소였는데 이곳에는 후쿠오카(福岡)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시라미즈 겐키치(白水健吉), 센다이(仙臺)의 치바 규노스케(千葉久之助), 후쿠시마(福島)의 혼마 규스케[本間九介-당시 아다치 구로(安達九郞)라 칭했다: 원문], 치바(千葉)의 구즈우 슈스케(葛生修亮-能久: 원문) 등이 기거했고 가나자와(金澤)의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쓰시마(對馬)의 오쿠보 하지메(大久保肇), 다니가키 가이치(谷垣嘉市), 후쿠오카의 니시무라 기사부로(西村儀三郞) 등 부산에 재류하는 동지를 비롯해 경성에 재류하는 후쿠오카의 시바타 고마지로(柴田駒次郞), 군마(群馬)의 다나카 지로(田中侍郞), 가나자와의 세키야 오노타로(關谷斧太郞), 히라도(平戶)의 데라다 데이사부로(寺田鼎三郞) 등도 출입하며 서로 대륙 경영의 웅지(雄志)를 말하여 풍운이 한 차례 일어나면 함께 궐기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 지사들이 밤낮으로 자주 음송하는 것이 “일찍이 가마쿠라 미나모토(鎌倉源) 우부(右府)의 묘에서 아뢰기를, 내가 대명(大明)을 정벌하고자 하는데 너는 어찌 여기는가. 대장부라면 마땅히 만 리 밖에서 무위를 펼쳐야지, 어찌 노쇠한 작은 섬에서 우울하게 있겠는가.[曾謁鎌倉源右府墓、我欲征大明汝諾否、大丈夫當用武萬里外、何爲鬱鬱老小洲]”라는 구절로 낭랑하게 이를 음송하여 헌앙(軒昂)의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 기대를 보이는 것이 통상이었다. 오사키 마사요시와 요시쿠라 오세이, 치바 규노스케 이보다 앞서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가 조선 내지 여행을 시도하였다가 동상에 걸려 양발의 엄지발가락을 절단했는데 상처가 쉽게 낫지 않아 도쿄로 돌아가 요양하던 중 1892년 가을 불편한 발을 이끌고 도쿄(東京) 우시고메(牛込)의 요코테라마치(橫寺町)에 있는 오사키 마사요시(大崎正吉)의 집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 시찰담을 이야기한 뒤 오사키에게 조선으로 건너갈 것을 권한 것이 발단이 되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 크게 뜻을 펼치자는 맹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오사키가 서둘러 조선으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하자 오사키와 마찬가지로 센다이 출신의 학생인 치바 규사부로(千葉久三郞)가 그것을 알고 육군 특무조장(特務曹長)이었던 자신의 친형 규노스케(久之助)가 최근 군직을 벗어나 자주 조선으로 갈 것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부디 동행시켜 달라는 희망을 전해 왔다. 오사키가 이를 흔쾌히 승낙하자 치바 규노스케도 서둘러 상경해 왔다.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나 막막한 것은 세 명분의 여비 조달이라는 문제였다. 대개 유지가(有志家)의 행동에는 언제나 그 이면에 활동 자금의 부족이라는 곤란을 동반하는 것이 상례이다. 여비 조달의 고심 당시 세 명이 여비 조달을 위해 고심한 실정은 실로 매우 참담하였다. 오사키가 그때의 사정에 대해 스스로 수기를 남긴 바에 따르면, 오사키는 치바의 상경을 기다리다 그와 엇갈려 고향인 센다이(仙台)로 돌아가 약간의 여비를 조달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세 명분의 도항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요시쿠라, 치바 기타 두세 명의 친우(親友)와 상담한 끝에 요시쿠라를 교토(京都)까지 먼저 보내고 그로 하여금 교토에서 여비를 마련하게 하고 오사키와 치바는 4~5일 늦게 교토에 도착했다. 그런데 요시쿠라는 교토에서 한 푼도 마련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요시쿠라가 마음을 두고 있는 곳 두세 군데에 전보로 의뢰를 하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느 곳에서도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요시쿠라의 고향인 가나자와에서 갑자기 부친이 찾아와 “조선 도항에는 동의하지 않으므로 확실하게 생각을 접고 가나자와로 돌아가라.”라고 엄명하였다. 요시쿠라가 아무리 애원하여도 단호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귀향할 것을 계속 재촉하였다. 요시쿠라도 매우 난처해 오사키를 향해 “어떻게든 아버지를 납득시켜 달라.”라며 도움을 구했기 때문에 오사키는 요시쿠라의 아버지에게 “사실은 이번 조선행은 동양 문제와 중대한 관계를 갖는 임무에 따른 것으로 아드님과 우리 두 명은 동지들의 선발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아드님의 도항을 중지시킨다면 우리들을 선발한 의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지들에게 대단한 차질을 가져오기 때문에 제지하시려는 마음은 거듭 잘 살피고 있지만 이번에 뜻을 굽혀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진실과 거짓말을 섞어 잘 알아듣도록 열심히 설득했다. 요시쿠라의 아버지는 그것을 듣고 잠시 조용히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렇다면 아들의 도항을 허락하지요.”라며 비로소 동의한다는 말을 하였다. 요시쿠라는 아버지에게 여비의 지출을 청하였지만, 아버지는 가나자와로 돌아갈 여비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뒷일을 오사키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사키는 요시쿠라의 아버지에게 그러한 점을 말한 관계로 요시쿠라를 헛되이 일본에 머물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그날 바로 요시쿠라를 조선으로 보내고 자신과 치바는 교토에 머물며 여비 조달을 궁리했고 다시 오사카로 가서 여러 가지로 애써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에 그쳤다. 따라서 오사키는 다시 센다이로 돌아가 먼저 치바의 친형을 방문해 실상을 말하고 치바를 위해 도항비 송금을 청하였는데 기분 좋게 승낙을 받았다. 이에 기세를 올려 바로 자신의 여비 조달에 착수해 20여 일간 고향에 머문 뒤 마침내 약간의 돈을 구할 수 있어서 드디어 조선으로 향했다. 오사키와 다케다 한시, 혼마 규스케의 첫 대면 오사키는 세 명 가운데 자신만 가장 늦게 부산에 도착했는데 상륙한 뒤 벤텐쵸(辨天町)의 아리마(有馬)라는 여관에 투숙하였다. 저녁식사를 할 때 술을 시켜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천우협으로 오사키와 생사를 같이한 다케다 한시와 혼마 규스케로, 이때 원래 첫 대면하는 사이였는데 이 무례한 침입이 그들의 깊은 교제로 연결되는 발단이 되었다. 지사의 조우 역시 진기하다고 할 수 있다. 다케다 한시는 구루메(久留米)에서 태어나 에치고(越後) 현성사(顯聖寺)의 학승(學僧)이 되었는데 천성이 활달하고 학문에 재간이 뛰어나 매우 지사적인 풍격을 지닌 풍운아였다. 이전부터 조선에 뜻을 품고 조선의 지사 이주회(李周會)와 사귀고 후쿠오카 사람 유키 도라고로(結城虎五郞)와 함께 어선 10여 척을 이끌고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이겨내고 이주회의 귀양지[謫地]인 전라도 금오도(金鰲島)로 가서 어업을 하는 한편 화물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그 무렵 부산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또 혼마 규스케는 후쿠시마현(福島縣) 니혼마쓰(二本松) 사람으로 같은 현 사람인 스즈키 덴간(鈴木天眼) 등과 사귀고 일찍이 대륙 경영에 뜻을 두고 수년 동안 조선에 출입하며 풍운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지사였다. 이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빈한한 처사(處士)로 그 무렵 아리마 여관에 투숙하며 다케다와 함께 좌초된 불우한 처지가 되어 누군가 동지가 투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먼저 도착한 요시쿠라 등으로부터 미리 오사키의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예고 없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오사키는 무엇보다도 먼저 요시쿠라와 치바의 소식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이를 물었더니 “요시쿠라는 이곳의 작은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하숙집에 있을 것이고, 치바는 며칠 전 다대포(多大浦)로 갔는데 아마 그 주변을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 다케다와 혼마도 가벼운 정도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깊은 대화를 하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다음 날 오사키는 다대포로 가서 치바를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어 되돌아갔고 다시 그다음 날 요시쿠라의 하숙집을 방문하자 마침 치바도 그곳으로 돌아와 있어 세 명이 여기에서 비로소 교토 이후의 정을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치바는 그날부터 아리마 여관에서 오사키와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그다음 날 밤 다케다와 혼마가 오사키에게 자신들의 방으로 올 것을 요청해 오사키가 바로 두 사람의 방으로 갔더니, 다케다와 혼마 모두 무슨 까닭이 있는 듯 싱글거리며 담배를 피울 뿐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면서 쉽게 말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사키가 눈치를 채고 “나에게 방으로 와 달라는 것은 어떠한 볼일인가.”라고 묻자, 다케다는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실례지만 온정으로 술 한 되를 얻고 싶다. 당신에게 방으로 올 것을 청한 것은 사실은 그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라며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고 껄껄 웃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곧바로 명하겠다.”라며 오사키는 술과 안주를 주문하였다. 치바도 이 자리에 합석해 서로 권하며 잔 수가 거듭되는 가운데 바로 화제는 홀연히 조선 문제에서 동양 문제로 나아가 모두 기염을 토하며 이전부터의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서로 10년 지기의 느낌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혼마는 마침내 화제를 일전하여 “아! 나도 오랫동안 어려운 처지에 있어 수십 일 동안 술을 입에 댈 수 없었는데 지금 술을 얻어 유감없이 마른 배 속을 채울 수 있었다. 아! 매우 유쾌하다. 이건 모두 오사키 씨의 선물이다. 일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네 명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고 이어서 유쾌한 이야기에 밤이 새는지도 몰랐다. 지사의 투합과 양산박의 상담 술을 함께 하고 의기투합한 네 명의 교제는 그로부터 갑자기 친밀해져 그다음 날에는 다케다와 혼마가 재빨리 부산에 재류하는 동지 니시무라 기사부로, 오쿠보 하지메, 다니가키 가이치 외 두세 명의 유지를 데리고 와 오사키 등에게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다니가키, 오쿠보 등은 “현재 부산의 재류민이 조선인에게 대부한 돈은 총액 백 수십만 원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영사관에 지불청구소송을 제기한 금액이 70만 원을 넘고 있다. 그에 관해 영사관에서 조선 감리서에 교섭을 시도했지만 도무지 결말이 나지 않아 해결을 본 것은 아직 단 한 건도 없는 상황이다. 영사관도 매우 처치 곤란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법률 지식이 있는 일본인이 나서서 해결의 책임을 맡는다면 영사관은 기뻐하며 이를 묵인할 것이고 거류민도 앞다투어 의뢰를 해 올 것이다. 어떤가, 제군들이 이 일에 종사할 생각은 없는가.”라고 말했다. 이것을 들은 혼마는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 다행히 오사키 군이 오랫동안 법률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사키를 주임으로 하고 우리는 그 지휘에 따라 일하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했다. 일동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이에 찬성했다. 오사키도 이 계획에는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개업하기로 결정했는데 사무소를 열려고 해도 모두 무일푼으로 집 한 채 빌릴 힘이 없어 결국 방 한 칸을 빌려 간판을 걸기로 하고 다니가키 가이치가 셋방을 구하기로 하였다. 야마자 엔지로의 후의 당시 부산영사관에는 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室田義文) 아래에 영사관보로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가 재임하고 있었다. 다케다 한시와 야마자는 같은 후쿠오카현 사람인 관계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다케다가 그 뜻을 알리고 야마자의 양해를 얻었다. 야마자는 다음 날 아리마 여관으로 오사키를 방문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대차(貸借)상 쟁의 해결 수단 등에 관해 오사키의 의향을 물었다. 또 그 취급 등에 관해 여러 가지 주의를 주고 돌아왔다. 또 당시 부산경찰서장 우쓰미 시게오(內海重男)도 후쿠오카현 사람으로 야마자와 마찬가지로 겐요샤(玄洋社)에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유지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야마자는 보통 관리와는 달리 자진해서 유지가와 사귀고, 무로타 총영사가 오사키 등의 법률사무소의 존재를 못마땅해 했던 것에 반해 야마자는 시종일관 유지의 행동을 후원하고 나중에 천우협이 실패하게 되었어도 조사 관리로서 어디까지나 변함없이 호의를 보냈다. 간판은 오사키 법률사무소 다니가키의 알선에 의해 부산 용두산 아래 한 상점의 2층 방 두 개를 빌려 그곳에 오사키 법률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오사키, 치바, 다케다, 혼마 네 명이 바로 이사했다. 그런데 큰 간판을 내걸고 의뢰자가 오기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개업 후 10여 일이 지나도 한 명의 의뢰자조차 없어 네 명은 더 이상 진기한 이야기도 동이 나서 “아! 네 나한(羅漢)이 여기에 계시는데 한 명의 참배자도 없는가.”라며 탄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명의 의뢰자가 찾아왔다. 일동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맞이하여 오사키가 나가 응접하자 뒤에서 “제대로 해라, 모처럼 걸린 좋은 새를 놓치지 말라.”라며 작은 소리로 격려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대차 문제가 아니라 세관에 관한 문제였다. 손님은 부산의 오복상(吳服商)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라사를 사 와서 부산에서 하역하려고 할 때 세관 관리의 손에 압수되었는데 그 조치가 불법이므로 압수를 풀도록 교섭해 달라는 의뢰였다. 그 물품은 시가 2백 원 정도로 완전히 몰수될 운명에 있었는데 오사키 등에게는 사무소 창설 이래 최초의 사건이며 사무소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건의 내용과 성질 등을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형편상 성공과 실패 여부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 오사키는 그 자리에서 “문제없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라고 단언하며 의뢰를 인수했다. 다음 날 오사키가 담판을 위해 세관을 방문했더니 세관장은 부재중이고 차장이 나와 응접했다. 그 설명을 들어 보니 일본 상인의 행위가 명확히 불법이고 몰수의 취소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에 오사키도 당혹했지만 지금 와서 물러나려 해도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내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날카롭게 차장의 말을 반박하였다. 한 시간쯤이나 논쟁을 계속한 끝에 결국 영사 법정에서 다투겠다는 것을 알리고 분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무렵 부산세관은 세관장이나 차장 모두 영국인이고 그 아래에 일본인과 중국인 통역이 있었는데 오사키는 중국인 통역을 써서 논쟁했다. 사건을 처음 해결하고 축배 오사키가 사무소로 돌아와 서너 시간 지날 무렵 야마자(山座) 영사관보로부터 호출이 와서 찾아갔더니 야마자는 “세관과의 논쟁은 조금 너무 강경했던 듯하네. 방금 전 세관장이 와서 자신이 세관장이 된 이후 오늘과 같이 강경한 담판을 받은 적은 없고 이러한 사소한 문제로 귀중한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은 자신의 본뜻이 아니라며 불평을 호소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 말을 양해하고 시가 1할의 관세를 납부하는 것으로 해결해 달라고 말했더니 승낙하고 돌아갔다. 내일 서둘러 절차를 밟아 매듭을 짓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의뢰자로부터 충분히 사례를 받아 동지와 한 잔 기울이면서 앞날을 축하하는 것도 유쾌할 것이다.”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사키도 야마자의 조처에 감사하면서 자리를 물러났다. 그다음 날 세관차장과 간담한 다음 야마자가 말한 대로 관세 20원을 납부하고 물품을 수취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 뒤 축배를 들어 동지와 함께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를 축하했다. 그 뒤 계속하여 서너 건의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대차 사건을 해결했기 때문에 점차 일본인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 의뢰자가 갑자기 늘었다. 빌린 공간으로는 좁게 느껴졌으므로 부산 서정(西町)에 집 한 채를 빌려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한 장의 침구조차 없고 남자들만의 살풍경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 비용은 물론 찻잔과 냄비 등에 이르기까지 사건 의뢰자 가운데 정이 두터운 사람이 기부해 이에 비로소 당당한 오사키 법률사무소가 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 계쟁(係爭) 사건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건으로 지목된 김해부사 민(閔) 모(某)와 거류민 사카구치 구헤이(坂口九平)의 사건을 해결하게 되자 처음에 호의를 갖지 않았던 무로타 총영사조차 매우 기뻐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카구치 사건의 교섭이 한창 진행되던 때 야마자의 소개로 구즈우 슈스케가 스가사와라 간시치(菅佐原勘七)와 함께 다니가키를 동반해 오사키 사무소를 찾아왔다. 구즈우는 형 겐타쿠(玄晫)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나 김옥균과 매우 밀접한 교제를 맺어 항상 동아시아 문제에 열중하고 있던 관계이므로 자연스럽게 조선 문제에 뜻을 품게 되었다. 한때 오사카 사건의 주모자였던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의 문하에 있었는데 마침내 자신의 뜻을 오이에게 밝히고 찬성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비를 선배에게 청하는 것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단지 오이로부터 그 무렵 방곡령 문제로 이름을 떨친 주조선공사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巳)에 대한 소개장을 받아 그해 4월 중순 화려한 도시를 뒤로하고 표연히 도쿄를 떠났다. 도중에 도카이(東海), 기나이(畿內), 산요(山陽), 규슈(九州)를 도보로 통과하여 후쿠오카에 들러 겐요샤에 한 달여 동안 머문 뒤 이어서 사가(佐賀), 구마모토(態本), 시마바라(島原), 나가사키(長崎) 등을 순차로 여행하고 사가현 요부코(呼子)항을 통해 바다를 건너 잇키(壹岐), 쓰시마(對馬)를 거쳐 가을바람이 몸에 스미는 10월 초순 범선을 타고 쓰시마의 시카미(鹿見)항을 출발해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던 것이다. 동행한 스가사와라도 마찬가지로 오이 문하의 서생으로 구즈우가 쓰시마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뒤를 쫓아와 함께 부산으로 건너간 것이다. 당시 구즈우는 부산에 상륙하자 바로 경성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이미 품속에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도중의 곤란함을 생각해 스가사와라를 부산에 남겨 두고 단신으로 경성행을 결정하려고 용두산에 올라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뜻하지 않게 머리에 떠오른 것이 후쿠오카에 체재 중 겐요샤에서 교제한 야마자키 고자부로(山崎羔三郞)가 “부산에 가면 야마자 엔지로라는 인물이 영사관에 있으므로 꼭 방문하기 바란다.”라고 권한 말이었다. 구즈우 슈스케(葛生修亮)의 도한과 야마자의 친절 구즈우는 야마자키의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서둘러 용두산을 내려와 영사관으로 가서 야마자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야마자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흔쾌히 면회하고 구즈우가 말하는 것을 들은 뒤 “경성으로 가는 것도 그리 서둘 필요는 없다. 또 조선 문제에 뜻을 펼치기에는 부산을 알아둘 필요도 있다. 특히 부산에는 장래를 위해 지인으로 만들어 두면 좋은 유지가도 와 있기 때문에 잠시 이곳에 머문 뒤 경성으로 가더라도 늦지는 않다. 어쨌든 오늘 밤은 내 관사에 머물기 바란다.”라고 친절하게 제지하며 심부름꾼을 불러 구즈우와 스가사와라를 관사로 안내하게 했다. 이어서 야마자도 집으로 돌아와 함께 만찬을 했는데 그곳에 다니가키 가이치와 니시무라 기사부로가 방문해 왔기 때문에 야마자는 구즈우 등을 두 사람에게 소개하고 두 사람이 돌아갈 때 “내일 그대들은 오사키 씨의 법률사무소로 가서 구즈우 군 등을 안내해 달라.”라고 의뢰했다. 레키산(歷山)의 참가와 유지(有志)의 여행 상황 다음 날 다니가키가 관사로 와서 구즈우와 스가사와라를 오사키법률사무소로 데리고 갔는데 구즈우가 말해 보니 오사키는 오이 문하인 고코 쥰(鄕古醇)과 친구이고, 다케다는 겐요샤 사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시라미즈 겐키치(白水健吉)는 야마자키 고자부로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첫 대면이라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인연이 있어 오래된 지인과 같았다. 오사키 등은 “스가사와라 군은 물론이지만 자네도 잠시 이곳에 체재하며 법률사무소를 도와 함께 풍운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어떠한가. 경성에도 동지가 있으므로 가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 급할 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제지하였다. 구즈우는 이미 부산까지 온 이상 반드시 경성에 급히 갈 필요도 없고 또 모처럼 찾아가려고 생각한 오이시(大石) 공사도 이미 귀국한 뒤였기 때문에 잠시 그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11월이 되어 혼마 규스케와 치바 규노스케는 경성으로 갔는데 두 사람이 간 뒤 얼마 되지 않아 경성으로부터 데라다 데이사부로(寺田鼎三郞), 오카모토(岡本) 모(某) 외에 두세 명의 청년이 와서 참가했으므로 양산박은 변함없이 붐볐다. 이 데라다는 히라도(平戶) 오사와 류(大澤龍)의 동생으로 평소 두꺼운 쇠지팡이를 들고 보행하였다. 경성에서 육로로 부산으로 오는 도중에도 조령(鳥嶺)에서 도적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그 쇠지팡이로 쫓아 버렸다며 매우 왕성한 기세를 보였다. 키가 크고 이마가 튀어나온 잘생긴 남자로 아주 검게 탄 얼굴에는 단지 눈과 치아만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 괴이한 얼굴에 보조개를 짓고 있는 표정에는 일종의 특별한 애교가 있었다. 누군가가 놀리며 “너는 알렉산드리아의 흑인 노예가 아니냐.”라고 말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이후 모두 “레키산, 레키산(歷山歷山)”이라고 불렀는데 본인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한층 익살스러웠다. 당시 부산과 경성 사이의 교통은 인천으로 가는 배편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 4~5일에 한 차례 출항한 데다가 뱃삯도 싸지 않았기 때문에 지사(志士) 동료들은 대체로 육로를 통해 왕복했다. 육로로 가면 도중에 조령 고개도 있어 편도 120리의 긴 길을 도보로 여행하고 -수레나 말도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와 같은 것을 이용할 여유가 없었다- 여비로 필요한 한전(韓錢) 1관(貫) 5백 푼[文](동전으로 1,500매)을 허리나 어깨에 메고 10일에서 12~13일의 여행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편이고 그 가운데는 도중에 매약(賣藥) 행상을 하여 여비를 조달하면서 가는 자도 적지 않았다. 요시쿠라 오세이의 난폭함 양산박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잠자고 있는 영웅호걸들에게는 더 이상 없는 안식 장소인 한편, 법률사무소 쪽도 나날이 번창하였다. 그러는 사이 1893년은 저물고 1894년의 봄을 맞이해 남한의 한기도 점차 누그러질 무렵이 되자 지금까지 경성에 들어가 있던 치바와 혼마 두 사람도 다시 부산의 양산박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세키야 오노타로도 경성에서 부산으로 옮겨 임시거처를 정했다. 이어서 얼마 되지 않아 다나카 지로(田中侍郞)도 경성에서 와서 부산에서 그들의 왕래가 점차 빈번해짐에 따라 경찰 측에서도 이에 대해 주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잠시 동지를 긴장시킨 하나의 애교 있는 충돌 사건이 동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어쨌든 조선 문제가 활기를 띠어 온 것과 관련해 요시쿠라 오세이가 신문에 왕년의 오사카 사건을 공격한 문장을 게재하며 오이 겐타로는 사리분별이 없는 만용적 인물이라고 평했기 때문에, 이것을 읽은 구즈우는 오이와 사제의 정이 있었으므로 매우 분개하여 요시쿠라가 양산박으로 오는 것을 기다려 별실로 불러 권총을 들이대면서 혹평을 힐책했던 것이다. 요시쿠라는 구즈우의 강경한 담판에 부딪혀 매우 낭패하여 백방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했으나 구즈우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구즈우의 요구대로 사죄 방법을 취할 것을 약속하고 겨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이층에 올라 오사키 등에게 구즈우의 난폭함을 호소했다. 그때 오사키는 요시쿠라의 말을 가로막고 “그것은 구즈우가 난폭한 것이 아니다. 난폭의 원인은 자네가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네가 잘 구즈우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요시쿠라는 “구즈우는 구두로 사과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구즈우의 요구대로 신문에 사죄문을 게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사죄문도 구즈우는 멋대로 쓰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요구에 따르기로 했으나 구즈우는 아마도 혼자서 그러한 문장을 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네나 다케다 군이 부디 대필이나 첨삭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간절히 청하고 돌아갔다. 구즈우의 태도가 진지했기 때문에 요시쿠라도 도저히 약속의 실행을 피할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구즈우가 어떠한 사죄문 원고를 들이밀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고 있던 끝에 마침내 다시 사무소로 와서 오사키 등을 중개로 하여 “신문사를 그만두는 것을 조건으로 삼을 것이므로 사죄문 게재의 요구는 철회해 주기 바란다.”라고 제의했다. 구즈우가 그것을 승낙하자 약속 기일에 이르러 요시쿠라는 자신이 일하는 신문의 광고란에 2호 활자로 “제1세 초망(草莽) 논객이 본사를 그만두고 제2세 초망 논객이 다시 집필한다.”라는 내용의 사고(社告)를 게재하고 그 지면을 들고 양산박으로 와서 구즈우에게 제시하며, “이제부터 자네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넉살 좋게 미소를 지었다. 요시쿠라는 이 같은 뻔뻔한 점이 있어 때때로 그 때문에 손해를 본 적도 있는데, 구즈우도 이때는 과연 그 뻔뻔함에 질려 추궁할 기분도 나지 않았고 도리어 그 뻔뻔함에 홀딱 반하여 이후 우정이 더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옥균의 효수 탈취 계획 이러한 애교 있는 한가한 갈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의 사건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것은 조선 국왕이 중국의 이홍장과 모의해 자객 홍종우(洪鐘宇)로 하여금 독립당의 지사 김옥균(金玉均)을 상해(上海)로 꾀어내 살해한 사건이다. 도쿄에서는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이 문제로 중국에 급히 갔고 의회에서는 대외경(對外硬 일파가 문죄(問罪)를 건의하는 등 문제가 매우 중대시되어 국론이 갑자기 비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4월 중순 절단된 김옥균의 시체가 양화진(楊花鎭)에서 효수되기에 이르자 조선에 있는 유지의 분노가 정말 극에 달했다. 구즈우는 효수된 김옥균의 머리를 탈취하려고 결심하고 오사키의 손을 통해 여비 조달에 노력했으나 그 사이에 시체가 마침내 치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원통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무렵 시바타 고마지로가 경성에서 와서 야마자의 소개로 양산박의 일원이 되었다. 위풍당당한 많은 인재가 다 함께 칼을 차고 풍운을 바라보면서 웅비의 기회를 엿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구즈우는 징병검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고, 혼마 규스케 역시 일단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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