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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아선각지사기전 東亞先覺志士記傳
일러두기

1894년 5월경이 되자 조선 내지의 불온한 소식이 자주 사방에서 전해졌다. 소식은 “전라도에 동학당이 봉기하였는데 그 세력이 창궐하여 중심도시인 전주는 이미 당 무리의 손에 떨어지고 경성의 관군이 토벌에 나섰지만 모두 격파당했다.”라는 것이다. 또 “경상도 대구 역시 위험하다.”든가 “당 무리는 부산과 매우 가까운 동래부에 접근했다.”라고 한다. 유언비어가 날로 심해지고 인심은 흉흉하여 편히 지낼 수 없는 상태였다. 부산의 양산박에 있던 청년 지사의 면면은 이러한 경보를 들을 때마다 심하게 충격을 받고 분개하여 씩씩한 마음과 장한 뜻이 약동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시조(始祖) 최제우(崔濟愚) 원래 동학당이라는 것은 이조(李朝) 25대 철종 말년 경상도 경주의 도학자(道學者) 최제우, 호(號)를 수운(水雲)이라고 칭하는 자가 유도와 불도, 선도를 하나로 합친 도학을 발표하고 이를 동학이라고 칭하며 세상에 선포한 것에서 시작한다. 최제우는 이를 확산하면서 “나는 도를 하늘로부터 전수받았다.”라고 칭하고 특수한 주문을 읊고 “우리 가르침을 믿는 자는 재화(災禍)를 면하고 복수(福壽)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를 신봉하는 자가 많고 수운 선생이라는 큰 이름은 일시에 밝은 별과 같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유사종교의 선교자가 소동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일으키는 것은 국가에 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라는 명목으로 포박하여 대구에서 참죄(斬罪)에 처했던 것이다. 이때 최제우는 42세였는데 처형에 임하며 “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時花]”라는 구절을 남겨서 나 한 명을 죽일지라도 물이 흘러 큰 바다를 이루는 것같이 수운의 뜻은 후학의 전통에 의해 크게 이루어져 백화난만(百花爛漫)하듯이 크게 번성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뜻을 풍자했던 것이다. 이 최제우에게는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 또한 유능한 인물이어서 동학교도는 그를 추대해 제2세 도주(道主)로 받들고 최시형 자신도 역시 관리의 압박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동학 천도(天道)의 교의를 선전하는 데 노력했다. 민씨 척족의 발호 전횡과 민인의 고통 그 사이에 철종이 서거하여 이태왕이 왕위에 즉위한 것인데 외척이 발호하여 권신당(權臣黨)을 만들어 이조의 정도(政道)는 더욱 어지럽게 될 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민씨 척족 일파의 전횡 시대로 궁정에서는 민비가 이태왕의 총애에 의지하여 정치에 간섭하여 암탉이 설쳐 기강이 완전히 문란해졌다. 민씨 일족은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의로운 선비를 물리치고 매관(賣官), 뇌물, 주구(誅求)의 악폐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 궁중은 아첨꾼, 무당, 광대, 잡배의 무리가 날뛰어 온갖 귀신의 소굴 상태가 되었다. 특히 중앙으로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대소 관리가 뇌물, 주구를 일삼아 서민은 어떻게 뇌물을 바치는지에 따라 죄의 유무가 결정되어 세상에 억울한 죄로 우는 자가 적지 않았다. 가렴주구 때문에 민력이 피폐하고 백성이 도탄에 괴로워하는 참상에 이르러서는 거의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편에서는 궁중의 왕족과 권관(權官)을 비롯한 탐관오리가 교만과 사치에 빠지고 밤늦게 연회를 펼쳐 제멋대로 환락을 즐기고 있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어 악정에 눈물 흘리는 백성이 원망의 감정을 더해 가는 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제2세 최시형 마침내 농민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 군수를 죽이고 관아를 파괴하여 천하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충청도의 산고을을 근거지로 천하의 악정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를 배격하는 것을 표지로 삼아 분연히 의로운 깃발을 올린 것이 동학 제2세 도주(道主)인 최시형(崔時亨)이다. 불평을 품은 지방민은 울림에 응하듯이 앞다투어 일어나 이에 가담하여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육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창고를 점령하여 마침내 계림(鷄林) 팔도를 풍미하려는 기세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의 궐기 처음에 관군은 상주에서 이 동학당군을 격파하여 조금 진정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전라도 태인군의 향사(鄕士) 전봉준이라는 호걸이 일어나 무리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자 다시 기세를 더해 동학당은 일거에 전라도의 고부를 습격하고 군수를 죽이고 군아(郡衙)를 불태웠다. 군아에 축적되어 있던 금곡(金穀)은 모두 도탄의 고통에 우는 군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서 의군(義軍)은 명성과 기세를 크게 떨쳤고, 인민은 음식을 가지고 이들을 환영하였고, 창을 들고 와서 가담하는 자가 순식간에 수만 명에 달했다. 동학군이 내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기풍은 천하를 풍미하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었다. 당시 동학당의 당원이 외친 시는 다음과 같다. 동학당 시(詩) 아름다운 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뭇사람의 피요 金樽美酒千人血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玉盤佳肴萬姓膏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燭淚落時民淚落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드높도다 歌聲高處怨聲高 이러한 매우 비창(悲愴)한 구절로 이루어져 당시의 학정을 저주하고 또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으나 오랫동안 도탄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민중이 이 당시(黨詩)를 크게 노래하고 또 동학의 신비한 주문을 읊으면서 나아갔다. 이에 지금까지 폭정을 자행한 탐관오리는 실색하여 도망치고, 어영(御營)과 훈련 관군도 무기를 내던지고 당군(黨軍)에 투항하는 상황이었다. 니시무라 기사부로(西村儀三郞)의 절치부심 부산 양산박의 지사는 각종 정보를 손에 넣고 마침내 적절한 시기가 도래한 것을 서로 기뻐했는데 너무나도 유언비어가 많아 진정한 형세를 명확히 알기 어렵고 이 점에 관해서는 매우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렵 니시무라 기사부로가 양산박을 방문해 절치부심하여 일동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고 “오늘날 이때 나와 함께 일어나 거사하는 자는 없는가?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맞이해 우물쭈물하며 시국을 앉아서 바라보는 것은 남자로서 떳떳하지 못한 바이다.”라고 말하며 일어섰는데 니시무라는 이 무렵 경솔하고 홀로 호방한 체하는 사람으로 그들 사이에서 배척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대하지 않아 조금 맥 빠진 모습이었다. 세키야 오노타로의 귀국 그런데 세키야 오노타로가 이 니시무라와 함께 귀국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으므로 그들은 세키야를 걱정하고 치바와 요시쿠라는 서로 돌아가며 충고했는데, 세키야는 충고를 물리치고 귀국 준비를 갖추고 출발하면서 오사키를 방문해 이별을 고했다. 오사키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향응하면서 “일시적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 영원한 이별도 슬퍼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금 자네가 니시무라와 함께 귀국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우 걱정을 금할 수 없다. 잘 생각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세키야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얼굴색을 바꾸며 “나는 니시무라를 의지하면서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사의 반열에 들어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지금부터 그를 교육시켜 지사의 반열에 들게 할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오사키는 “그 생각과 뜻은 감복하지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가.”라며 거듭 충고했다. 이 말을 듣자 세키야는 갑자기 화를 내며 일어나 바로 상 위에 있던 칼을 뽑아 오사키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오사키는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밥상 위의 잔을 들어 올리며 “지금 자네에게 목을 베이면 좋은 술을 마실 수 없게 된다. 잠시 내가 다 마시기를 기다려 달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잔에 술을 부어 몇 잔을 마셨다. 세키야도 이러한 오사키의 태도를 보고 “아! 대장부는 이와 같아야 한다. 내가 어찌 자네를 벨 것인가.”라며 칼을 칼집에 넣으며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서로 권한 뒤 이별을 고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동지의 걱정도 틀리지 않아 세키야는 과연 그 뒤 후쿠오카에서 니시무라 및 스에나가 세쓰(末永節) 등과 함께 경찰에 검속되어 도한(渡韓) 계획은 좌절되어 버리고 웅지(雄志)를 펼칠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동학당 정찰의 협의 당시 양산박의 동지 사이에서 우리들이 평소 속무(俗務)를 간판으로 삼아 시와 술로 방랑하고 있었던 것은 오늘날과 같은 시기를 기다리기 위함이다. 동학당의 형세를 잘 정찰하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 오사키의 발의로 두 명의 정찰자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인선에 관해 시라미즈 겐키치가 자진해서 그 임무를 맡겠다고 신청한 데 대해 다케다는 “시라미즈는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 나와 시바타가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주장하였다. 시라미즈가 “왜 내가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가.”라고 다케다에게 추궁하자 다케다가 업신여기는 말로 응수했기 때문에 시라미즈는 머리끝부터 화가 치밀어 바로 주먹싸움하려는 장면을 드러내었다. 오사키는 서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을 제지하고 “두 명이 서로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면 기회를 잃을 우려가 있으므로 나와 시바타가 그 임무를 맡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치바 규노스케가 “이런 중대한 경우에 오사키 군이 이곳에 없게 되면 모든 일이 잘못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번은 시라미즈 군이 다케다 군에게 양보하여 시바타와 다케다 두 명이 정찰하러 가고 시라미즈 군은 남아 오사키 군을 돕기로 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시라미즈를 달랬기 때문에 시라미즈도 잠시 뒤 그 말에 따랐다. 다케다와 시바타 두 사람은 그날 바로 여장을 꾸려 김해, 밀양 및 대구 방면을 향해 출발했다. 다나카 지로의 부산 귀환과 염복담(艶福談) 다케다와 시바타가 정찰에 나선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귀국 중이던 다나카 지로가 양산박으로 돌아왔다. 다나카는 나가사키에서 동학당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부산으로 돌아오려 했는데 여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지갑의 돈을 다 써서 겨우 쓰시마까지 승선하고 이즈하라(嚴原)에서 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한 푼도 구하지 못했다. 발길을 돌려 시시미(鹿見)로 갔는데 염두에 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져 이삼 일 여관에 체재하며 생각을 짜내고 있던 중 부산으로 향하는 어선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배에 편승을 부탁해 겨우 부산에 당도했던 것이다. 양산박에서는 쾌남아인 다나카가 큰 눈을 빛내고 살찐 체구를 흔들며 돌아와 나름대로 유쾌한 담화를 마음껏 하였기 때문에 크게 활기를 보였다. 다나카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호색꾼은 어디에 있더라도 여복이 따르는 법이다. 제군은 부러워하는 것을 그치고 귀를 씻고 들어 보라. 내가 시시미에 체재하고 있을 때 창문 너머로 미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를 보고 매우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쪽도 또한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 서로 시선을 주고받자 곧바로 이심전심이 되어 그 미인이 요염하게 부끄러워하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영웅의 마음이 흐트러진 실과 같아졌다. 그러나 영웅과 가인(佳人)의 기쁜 만남도 아침 이슬이 맺히는 사이에 안타깝게도 어선 때문에 헤어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만일 어선에 편승할 수 없었다면 나는 여관에 좌초되어 구제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음은 물론 어쩌면 마침내 백골이 되어 아마도 살아서 제군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다. 사실 제군이 놀랄 필요는 없다. 이 미인은 시시미에서 유명한 색정광(色情狂)이었다네. 하하하!”라며 대단한 야한 고백[色懺悔]을 하여 그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다나카가 돌아옴에 따라 더욱 활기를 띤 양산박에서는 다케다와 시바타가 정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며칠 내이기 때문에 드디어 계획의 실행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어 군자금의 조달과 동지 규합의 방법을 강구했다. 그런데 도저히 부산에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지의 대표자가 일단 귀국하여 선배와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그 대표자가 귀국하는 만큼의 여비조차 조달할 전망이 서지 않아 일동은 숙연할 뿐이었다. 혼마 규스케의 귀환과 1백 원 다발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법률사무소의 창밖에서 “어이, 여러 호걸이 있는가.”라고 외치는 자가 있었다. 누군인가 해서 이층에서 살펴보니 혼마 규스케가 털이 덥수룩한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서 있었다. “야! 혼마가 돌아왔다. 혼마가 돌아왔다” 환호성을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왔다. 혼마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어떤가’라고 하면서 앉으며 곧바로 가져온 가방을 열어 그 속에서 1백 원 다발을 꺼내어 오사키 앞에 던졌다. “별거 아니지만 규스케의 선물이다. 당장 급한 일에 도움이 되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기분 좋게 동지들에게 그것을 제공했던 것이다. 오사키를 비롯해 일동은 뜻하지 않은 자금을 얻어 매우 기뻐하며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있다면 곧바로 활동에 착수할 수 있다. 혼마 군. 매우 고맙다.”라며 감격하여 그것을 받았다. 생각건대 이 돈은 아키야마 데이스케(秋山定輔)가 조달한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다나카 지로에게도 급히 연락해 일동이 모인 뒤 여러 협의를 거듭하여 일단 오사키를 서둘러 도쿄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오사키 마사요시의 귀국 오사키는 다케다, 시바타가 정찰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으나 다음 날 저녁 출범하는 요도가와마루(淀川丸)에 승선하지 않으면 2~3일 동안 배편이 없기 때문에 다케다 등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릴 여유 없이 마침내 요도가와마루에 탑승해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마침 6월 하순으로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기 때문에 오사키는 서둘러 한 장의 홑옷을 조달해 그것을 입고 배에 승선했다. 오사키가 승선해 출항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를 쫓아 숨을 헐떡이며 배로 달려오는 자가 있었는데 다케다 한시였다. 다케다는 오사키가 출발한 뒤에 돌아와 오사키가 도쿄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바로 그 길로 정찰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다케다 한시의 정찰 보고 “밀양에서 대구 방면을 정찰한 바에 따르면 이쪽에는 아직 거사한 자는 없다. 그러나 소문이 분분하여 언제 어떠한 사변이 발발할지 헤아릴 수 없는 정세이기 때문에 한 번 나서는 자가 있으면 엄청나게 폭발하는 것은 불을 보는 것같이 명백하다. 만일 너의 사명이 도쿄에서 진행되지 않는 결과가 되더라도 길게 체재하지 말고 서둘러 돌아와 달라.” 다케다는 이렇게 말하고 오사키가 빨리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는 사이에 출범 시각이 촉박해져 “나머지는 돌아온 뒤 논의하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이때 오사키는 시바타가 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시바타는 돌아왔는가.”라고 물었더니 다케다는 슬픈 표정을 하고 “시바타는 병으로 밀양의 여관에 누워 있다. 나는 함께 돌아가려고 생각했으나 시바타는 시기를 놓쳤으므로 먼저 돌아가라고 말하고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정말 견딜 수 없었지만 그를 홀로 남겨 두고 왔다. 내일 아침 사람을 보내 데려올 작정이다. 중병은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하지는 말라.”는 말을 남기고 배를 떠났다. 정직한 사람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도야마 옹(頭山翁) 말함 마에바라 잇세이는 정직한 사람으로 오쿠보(大久保) 일파에 반대하여 적명(賊名)을 얻은 것은 가련한 일이다. 그것은 1876년 10월이다. 그때 백부(伯父)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구구절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나는 지금까지도 암송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충성스러운 계획이 깨지고 적이 되어 한을 머금고 구천(九泉)으로 돌아갑니다. 실로 필생의 유감입니다. 도요타(豐田)의 생사는 아직 모릅니다. 불쌍합니다. 저는 형제 세 명으로 실로 마음으로 충성하였으나 형태는 적입니다. 단지 천년의 공론(公論)을 기다립니다. 또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하여 들과 산에 숨고 북해의 파도에 떠돌며 훗날의 계획을 세우려 합니다.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면 천명입니다. 노형이 다행히 우리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잇세이(一誠)에게 머리를 숙인다. 강남보설유억무형(江南步雪有憶無形)[이타쿠라(板倉) 백작의 아호] 형에게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어젯밤 하늘 높이 바람 불고 눈발 휘날리는 일 잦더니, 초야는 색을 잃었고 땅은 은빛 띠는구나. 바닷가 추위에 떠는 매화나무를 누가 알았으랴. 도리어 민가에 기대어 홀로 봄을 알리네. 고토 백작을 추모함 가쓰 가이슈(勝海舟) 용기 있는 신하라고 칭찬하지만 걱정을 자아낸다. 오동 한 잎과 옥중작(獄中作) 오에 다쿠(大江卓) 용병은 본디 웰링턴[穵倫東]을 우러르나, 건업은 또 나폴레옹[那破翁]처럼 되기를 기약하였네. 지금까지 무엇이 몸에 누를 끼쳤겠는가. 담은 한 말[斗]만큼 크며 기세는 무지개처럼 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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