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가와마루(淀川丸)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 오사키 마사요시(大崎正吉)는 시모노세키에 배가 도착하자 정박 시간을 이용해 상륙하여 후쿠오카에 있는 세키야 오노타로(關谷斧太郞)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부산으로 돌아가라.”라는 전보를 보내고 다시 그 배를 타고 오사카(大阪)에 도착해 그곳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도쿄(東京)로 갔다. 오사키, 스즈키 덴간을 방문하다 오사키는 신바시(新橋)에서 바로 인력거를 몰아 당시 간다(神田) 신코쿠쵸(新石町)에 있던 니로쿠(二六)신문사의 스즈키 덴간(鈴木天眼)을 방문했다. 시각이 아직 아침이어서 주요 사원은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옛 친구인 나카다 다쓰사부로(中田辰三郞)가 출근하여 3층의 한 방에 오사키를 안내해 대담하고 있었는데 스즈키 덴간과 후쿠다 와고로(福田和五郞) 등이 출근하여 그곳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나카다와 후쿠다가 편집실로 나가고 스즈키가 홀로 남은 것을 기회로 오사키는 비로소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말하고 스즈키의 응원을 요청했다. 스즈키는 “아! 유쾌하구나, 유쾌하다. 덴간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필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할 터이니 안심하라. 나는 잠시 원고를 쓰고 오겠으니 그 사이에 잠시 이곳에서 쉬기 바란다.”라고 말하며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려고 하였다. 오사키는 “나는 지금부터 동해산사(東海散士) 시바 시로(柴四朗)를 방문해 응원을 청하려고 생각하는데 어떠한가.”라고 일단 스즈키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그것은 안 된다. 자네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은 세상의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어서 해만 있고 이익은 없다. 당분간 이 건물에 있으면서 피로를 푸는 것이 좋겠다. 모든 일은 내가 대신 뛰어다니겠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너를 부르도록 하겠다. 안심하고 내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바란다.”라고 말하며 스즈키는 모든 일을 인수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 이후 스즈키는 그 말대로 오사키를 니로쿠신문사 건물에서 휴식하게 하고 자신은 일심으로 전력하여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덴간의 쾌락(快諾) 어느 날 스즈키가 오사키에게 “시바카라스모리(芝烏森)의 해변 집으로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씨를 내방하기 바란다. 나는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라고 하는 통지가 있었다. 오사키는 곧바로 인력거를 몰고 해변 집으로 가자 스즈키가 나와서 귀에 입을 대고 “이곳에는 밀정이 모여 있기 때문에 대사를 상담할 수 없다. 쓰키지(築地)의 동양관(東洋館)에 마토노 한스케(的野半介)가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도 조금 뒤에는 그곳으로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사키는 길을 돌려 동양관으로 가자 마토노 한스케가 있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스즈키도 찾아와 세 명이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오사키는 또 니로쿠신문사 건물로 돌아왔다. 이 회합에서 군자금 및 인원 등의 일도 거의 목표가 정해지고 또 스즈키 자신도 동행하여 조선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즈키는 이전부터 폐병에 걸려 있어 때로 각혈하기도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기상이 강한 남자인 만큼 조금도 그것에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이렇게 병든 몸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토노 한스케의 진력과 도야마 미쓰루ㆍ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등 이보다 앞서 마토노 한스케가 김옥균 암살 사건에 분개하여 가와카미(川上) 참모차장을 방문해 참모차장으로부터 ‘불을 질러라’라는 등 풍자하는 말[諷辭]을 듣고 획책하고 있었던 것은 다른 항목에서 서술한 대로이다. 그러한 시점에 오사키 마사요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스즈키 덴간이 이에 찬성하여 도야마 미쓰루 등과 상담한 결과 저절로 마토노, 오사키 사이에 맥락이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토노와 스즈키의 잠행적 활동에 의해 착착 준비가 진전되어 마침내 위에서 말한 동양관의 오사키, 마토노, 스즈키의 회합에 의해 대강의 내용이 결정되기에 이른 바이다. 그리고 마토노의 이면에는 도야마 미쓰루, 히라오카 고타로 등이 있었던 것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사키가 니로쿠신문사 건물에 있으며 획책에 빠져 있는 무렵, 니로쿠사의 사장인 아키야마 데이스케는 마침 조선으로 출장을 가 있어서 오사키와는 끝내 만나 보지 못했는데, 스즈키 덴간이 있어서 오사키는 완전히 관헌의 주목으로부터 벗어나 예정된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구즈우 요시히사는 전에 징병검사를 위해 부산에서 귀국하는 도중, 배 안에서 열병에 걸려 매우 중태에 빠져 이후 형인 겐타쿠(玄晫)가 있는 교바시(京橋) 마루야쵸(丸屋町)의 사무소에서 치료 중이었다. 오사키는 구즈우의 형에게 면회하여 그 병의 상태를 듣고 이 중요한 시점에 공연히 구즈우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섣불리 대사를 알려 병중의 그를 번민하게 할 수 없어서 편지를 남기고 당분간 찾아온 것을 본인에게 숨기고 돌아갔던 것이다. 구즈우는 병이 좀 나아짐에 따라 비로소 오사키의 내방 소식을 듣고 서면에서 제시한 바에 따라 니로쿠신문사로 가서 나카다 다쓰사부로를 방문했는데 그때는 이미 천우협 일행이 조선의 내지 깊숙이 들어가 소식 불명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은 뒤였다. 그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발을 동동거리며 안타깝게 느꼈던 것이다. 구사카 도라키치(日下寅吉)의 참가 어느 날 스즈키와 오사키가 니로쿠사의 건물에서 한담(閑談)에 빠져 있을 때 스즈키는 자신의 참가에 대해 “신중한 사람이 붓을 던지고 일어섰다. 이를 보더라도 이번의 대사는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 자네는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좋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자신이 임하는 의기(意氣)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무렵 오사키는 센다이(仙臺)의 구사카 도라키치에게 전보를 보내 “도한할 결심으로 서둘러 상경하라.”라고 말하자 구사카는 “바로 상경하겠다.”라는 답장 전보를 보내고 그다음 날 일찌감치 도쿄로 나와 니로쿠사에 있는 오사키를 찾아왔다. 그래서 오사키가 스즈키에게 구사카를 소개하자 스즈키는 “전보 하나로 일의 시비를 묻지 않고 바로 와서 대의(大義)에 참여한 것은 실로 지사(志士)의 모범이다. 이에 점쳐 보더라도 우리들의 계획은 성공할 것임에 틀림없다. 동인(同人)의 앞날 역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사키(洲崎) 다이하치만로(大八幡樓)의 송별회와 오사키, 스즈키 등의 출발 도쿄에서 대체적인 준비가 이루어질 무렵 도야마 미쓰루의 주최로 스사키의 다이하치만로에서 지사 송별의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다. 모인 사람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질 못하는 출정 길에 오르려는 지사를 중심으로 도야마와 히라오카 등 거두(巨頭)를 합쳐 전부 십수 명이었는데 모두 마음속에 왕성한 큰 뜻을 품으면서 표면으로는 단순한 유탕아(遊蕩兒)처럼 꾸미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밤새도록 진탕 마시며 야단법석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토노 한스케는 후쿠오카 겐요샤의 여러 동지와 모의하기 위해 별도로 먼저 후쿠오카로 돌아가고 그로부터 이삼 일 뒤에 오사키, 스즈키, 구사카 세 명은 많은 지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신바시역을 출발했다. 도키자와 우이치(時澤右一)의 참가 스즈키 등이 오사카에서 하차하여 여관에 투숙하고 있을 때 아라오 세이(荒尾精)의 소개장을 휴대하고 스즈키를 방문한 한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이는 휴직 중인 육군 중위 도키자와 우이치로 아라오의 소개장에는 다년간 조선에 뜻을 품은 자이므로 부디 이번 일행에 추가해 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아라오가 믿고 추천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일행에 추가하여도 좋을 것이기 때문에 참가를 승낙하기로 하여 도키자와는 여기에서 새로이 동지의 일원이 되었다. 오사카로부터는 둘로 나뉘어 스즈키 덴간은 바닷길로 모지(門司)에 가고, 오사키ㆍ구사카ㆍ도키자와는 기차를 타고 먼저 히로시마(廣島)로 가서 히로시마 사단의 출병 준비 모습 등을 살펴본 다음 모지에서 다시 만나기로 결정했다. 히로시마에서는 군인 출신인 도키자와가 지인 장교를 방문해 출병 준비 상황을 청취하고 쉽게 요령을 얻어 우지나(宇品)에서 배로 모지로 향했다. 히로시마(廣島)의 정보와 배 안의 축하연 배에 타고 보니 우연히도 스즈키 덴간이 배 안을 배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네 명은 마주 앉아 히로시마에서 얻은 정보를 말했다. 덴간은 도키자와의 말을 듣고 “만사 하늘의 도움이다. 한산(韓山)의 호랑이 소리도 며칠 안에 들을 수 있다. 유쾌하고 유쾌하다.”라고 연호하며 배 안에서 작은 연회를 가지면서 항해를 계속했다. 구사카는 원래 익살에 재능이 풍부한 남자로 취함에 따라 기언진어(奇言珍語)를 연발하여 일행을 웃게 하였는데 이윽고 낭랑하게 읊조린 것이 다음의 시 한 수였다. 붉은 산은 붉지 않으나 애인은 입술을 붉게 물들였고 紫山不紫愛朱唇 두남은 북극성은 아니지만 북극성을 가리키네 斗南不斗指北辰 하늘의 눈은 몽롱하여 보려 해도 보지 못하네 天眼䑃朧觀不見 희미한 36봉우리 봄을 依稀三十六峯春 이것은 덴간이 현실 세계에 붓을 잡고 있던 시대 쓰쿠다 도난(斗南) 즉, 쓰쿠다 노부오(佃信夫), 기타무라 시산(北村紫山) 즉, 가와사키 사부로(川崎三郞)와 함께 자주 기타자토(北里)에 원정을 가 아침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네기시(根岸)의 오교노마쓰(御行の松) 부근에 있던 두부탕집 사사노유키(笹の雪)에 들르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는 장난꾼[고쿠부 세이가이(國分靑崖)라고 전해지고 있다]이 세 명이 자주 눌러앉아 있던 방의 벽면에 제목을 적어 두고 뜻밖의 공격을 가한 시(詩)였다. 덴간이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시를 듣고 놀라는 것을 확인한 구사카는 “요시와라(吉原)의 정화(情話)는 듣고 싶지 않지만 36봉의 오하루(お春)는 그 뒤 누구에게 떨어졌는지 듣고 싶다.”라고 말을 꺼냈다. 덴간은 소리를 질러 웃으면서 “이놈! 어디에서 이러한 시를 배워 왔는가. 이것은 우리들의 비밀에 관한 시다. 다른 사람의 비화를 발설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이 불한당 놈”이라고 호통을 쳤다. 구사카는 틈을 주지 않고 “무엇! 속으로는 이러한 비화를 발설하는 불한당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는가.”라고 되받아쳤기 때문에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이러한 정신없는 농담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배는 항진하여 다음 날 아침에는 일찌감치 모지에 도착했다. 오하라 요시타케(大原義剛),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참가 상륙하여 이시다(石田) 여관에 들어서자 이미 마토노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토노는 “여기에서 승선하면 관헌의 방해를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일단 후쿠오카로 가서 겐요샤의 동지와 함께 쓰시마로 건너가 그곳으로부터 부산으로 건너간다면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즈키와 도키자와는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마토노와 함께 후쿠오카로 향하고 오사키와 구사카는 이날 저녁 출항하는 요도가와마루(淀川丸)를 타고 부산으로 직항하기로 정했다. 그런데 스즈키, 도키자와는 수 시간 뒤 다시 이시다 여관으로 돌아왔고 그와 거의 동시에 오하라 요시타케와 우치다 료헤이도 역시 같은 여관에 도착했다. 스즈키 등은 일단 후쿠오카로 갔지만 당국의 경계가 엄중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위험을 느꼈으므로 모지에서 승선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또 우치다와 오하라는 마토노 등의 통지에 의해 일행에 참여하기 위해 후쿠오카 겐요샤로부터 온 것이었다. 세키야(關谷) 니시무라(西村) 등의 귀국과 분주 우치다는 겐요샤의 사장이었던 히라오카 고타로의 조카로 15~16세 무렵부터 히라오카의 집에서 그의 훈도(薰陶)를 받았다. 또 히라오카의 문에 출입하는 많은 지사들과도 교류하고 일찍부터 타고난 골격을 발휘하여 19세 때에는 전에 히라오카가 중국과 조선에 파견했던 가나자와(金澤) 영진사(盈進社)의 지사 세키야 오노타로(關谷斧太郞)의 초청에 응해 조선으로 건너가 경략(經略)의 뜻을 펼치려고 기도했을 정도로 해외 경륜의 뜻에 불타오른 청년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간절한 충고에 의해 마침내 마음을 접었지만 그 뒤 히라오카를 따라 상경하게 되고, 동지 가운데 중국이나 조선을 연구하는 자는 많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를 시도하는 자가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 스스로 자진해 러시아 연구를 해야만 한다고 결심하였다. 동방어학교(東邦語學校)에 들어가 러시아어를 배우는 한편 강도관(講道館)에 입문해 유도를 익혔다. 그러나 조선 문제는 그가 결코 등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93년에 동학당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자 경성에 있는 동지와 연락을 취해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려 하였지만 이때도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94년 3월에는 징병검사 때문에 후쿠오카로 돌아갔다. 드디어 조선에서의 동학당의 봉기가 들려오고 정세가 매우 급박했기 때문에 이를 도와 크게 만들 수 있다고 보고 나가사키로 가서 스에나가 세쓰(末永節)와 상담했다. 스에나가도 찬성하여 함께 궐기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있어 이루지 못하고 공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후쿠오카로 돌아갔다. 다시 웅비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가운데 세키야 오노타로가 니시무라 기사부로와 함께 조선에서 돌아와 “동학당 원조를 위해 무기와 탄약을 구하러 돌아왔다.”라는 내용을 알렸다. 우치다는 내지에서 가볍게 무기와 탄약을 구하는 운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그것보다도 속히 조선으로 건너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는데, 세키야는 수긍하지 않고 니시무라와 함께 후쿠오카와 구루메(久留米)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빈번히 무기를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당시 우치다는 나가사키에 있는 스에나가에게 세키야 등의 행동을 알리고 일찍이 후쿠오카로 돌아오라고 권하고 어디까지나 스에나가와 행동을 함께할 작정이었다. 도쿄에 있는 마토노 한스케로부터의 통보 그런데 우연히 도쿄에 있던 마토노 한스케가 도쿄에서 오사키, 스즈키 등과 연계하여 일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무르익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여기에는 도야마와 히라오카 두 선배도 찬성하였고 겐요샤로부터는 우치다와 오하라 요시타케 두 명을 먼저 보내 부산의 여러 동지와 협력해 동학당과 연락을 취해 그 상황을 자세히 파악한 다음에 나아가 응원대를 보낼 예정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정으로 알고 있으라는 연락이 왔다. 이 소식을 접한 우치다는 흥분하여 곧바로 오하라와 회합하여 모의를 하고 그 결과 조선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카이케(赤池) 탄광에서 그것을 입수할 계획을 세웠다. 우치다는 이윽고 아카이케로 가게 되어 출발하면서 그 무렵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와 있던 스에나가 세쓰에게 구루메로 급히 가서 세키야를 만나 내일까지 세키야와 동행해 모지로 오도록 말을 남기고 출발했다. 우치다는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하면 바로 모지로 급히 가서 스에나가와 세키야를 동반해 조선으로 건너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세키야ㆍ니시무라 등의 실패 그런데 세키야는 우치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폭탄의 입수에 분주해하고 있었는데 우치다가 조선으로 가는 출발 시간에 맞추지 못하자 그 2~3일 뒤에 니시무라와 함께 폭탄 제조의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연이어 스에나가 또한 와타나베 고로(渡邊五郞), 시마다 게이이치(島田經一) 등 여러 명과 함께 구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치다의 다이너마이트 휴행(携行) 계획 실패 우치다는 아카이케 탄광에 도착해 광장(礦長) 고지마 데쓰타로(兒島哲太郞)를 만나 사정을 알리고 약간의 다이너마이트 공급을 요청하자 고지마는 흔쾌히 승낙하고 창고계의 오가와(小川) 모에게 포장을 명하고 우치다와 함께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우치다의 부형(父兄) 집으로 향했다. 그때는 이미 밤이 깊어졌는데 도중에서 그 탄광의 청원순사가 파출소 앞을 통과했는데 파출소에는 아직 등불이 밝게 점등되어 있어 무언가 평시시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고지마는 이를 보고 “파출소의 순사는 매일 밤 10시경에는 자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밤은 이미 11시가 지나고 있는데도 이처럼 등불을 밝게 점등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 잠시 상태를 엿보고 오겠다.”라고 말하고 조금 높은 곳에 있는 파출소 쪽으로 발소리를 줄이며 올라갔다. 이윽고 내려와서 “아무래도 형세가 좋지는 않다. 모르는 순사 두 명이 있어 청원순사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후쿠오카에서부터 자네를 미행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이너마이트의 휴대는 위험하므로 짐 싸는 것을 중지시키자. 나는 여기에서 돌아간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 우치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창연히 큰 한숨을 쉬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오하라 요시타케도 이미 도착해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부인 히라오카 도쿠지로(平岡德次郞)도 와서 우치다 양친 및 형 가노에(庚) 등과 대좌하고 있어 무언가 불안한 기색이 떠돌았다. 우치다 형제의 대역(代役) 우치다가 자리에 앉자 형인 가노에는 낮은 목소리로 “조금 전에 순사가 와서 오하라 군과 너에게 면회를 요구했다. 너는 집에 없다고 하고 오하라 군만 면회했는데 내일 나오가타(直方)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너도 반드시 소환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치다는 더욱 관헌의 감시가 엄해진 것을 알고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다시 순사가 왔다. 가노에가 나가서 응대하자 순사는 “귀하가 우치다 고 씨인가.”라고 물었다. 당시 우치다의 형은 가노에[나중에 다다미쓰(忠光)]이고 우치다는 고[고(甲), 료헤이(良平)는 나중의 이름]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가노에는 고(庚)와 고(甲)는 발음이 같기 때문에 시험 삼아 그렇다고 대답해도 좋겠다고 생각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순사는 “그렇다면 내일 본관과 함께 나오가타 경찰서에 출두하기 바란다. 본관은 내일 아침 다시 와서 동행한다.”라고 알리고 갔다. 가노에는 순사를 보내고 나서 우치다를 향해 “순사는 너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고(庚)와 고(甲)를 혼동해 돌아갔다. 나는 내일 순사의 요구대로 나오가타 경찰서에 동행할 것이므로 너는 다음 열차를 타고 모지로 향하는 것이 좋겠다. 우연히 두 명이 혼동되어 네가 관헌의 감시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재수가 좋다. 오늘 밤은 송별의 잔을 들어 앞날을 축하하기로 하자.”라고 하여 그로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술잔을 나누면서 담화에 빠졌고 가노에는 다음 날 아침 경관과 함께 나오가타로 향했다. 우치다는 그 뒤 숙부 도쿠지로로부터 받은 오사후네 노리미쓰(長船則光)의 칼이 든 지팡이를 휴대하고 부모에게 이별을 고했다. 도중에 나오가타역에서 환승을 위해 하차했는데 형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조금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때 소녀 한 명이 종이조각을 가져와 우치다에게 건넸다. 이상해하면서 그것을 보니 형의 필적으로 “객차를 같이 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었다. 주의해서 보니 가노에의 뒤에 사복 경관이 따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우치다는 마음속으로 경관의 멍청함에 웃으면서 다른 객차 안으로 들어가 무사히 모지에 도착하였고 목적지인 이시다 여관으로 들어갔다. 앞에서 오하라와 우치다, 스즈키, 도키자와가 거의 동시에 모지의 여관에 도착했다고 서술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우치다보다도 앞서 도착해 있던 오하라 요시타케는 경관의 요구에 따라 아카이케 탄광의 우치다의 집을 나와 나오가타 경찰서에 출두하였는데 후쿠류신보[福陵新報, 나중의 규슈일보(九州日報)]의 특파원증과 여행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 측에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 바로 석방하여 모지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우치다, 위기를 면하다 일동이 이시다 여관에 모두 모여 이제부터 바칸으로 건너가 마침내 승선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스에나가 세쓰로부터 배편이 하나 늦어진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한편 모지 경찰서까지 연행된 우치다 가노에(內田庚)는 그곳의 서장이 겐요샤 출신으로 히라오카 고타로의 친구인 오쿠라 슈노스케(大倉周之助)였기 때문에 모두 가노에의 말을 믿고 심하게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인 고(甲)는 상경한 것으로 말을 꾸며 무사히 경찰서를 나와 이시다 여관에 들러 사랑하는 동생에게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으므로 안심하고 출발하라.”라고 격려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일행은 바칸으로 건너가 승선표를 구해 순조롭게 부산행 기선에 탑승했다. 당시 도항권을 소지하지 않은 자는 승선표를 구할 수 없었는데 오사키는 미리 그 점을 고려해 부산에서 동지의 도항권을 여러 장 갖고 돌아왔기 때문에 일행은 이로써 순조롭게 승선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행, 무사히 바칸을 출발하다 밀모를 띤 출항이기 때문에 배웅하는 자는 없지만 숨막히는 경계를 하면서 무사히 선실로 들어간 일행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침내 배가 닻을 올리고 바칸의 부두를 떠나 조금씩 속력을 더하면서 나아감에 따라 일행의 의기는 바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이어서 배가 현해탄으로 나갈 무렵에는 해도 완전히 저물고 달은 휘영청 중천에 걸려 있고 바람도 없고 파도도 높지 않은 정말로 평온한 달 밝은 밤이었다. 선상의 감회 대사를 품은 자에게는 하늘도 그 앞길을 축복하는 것같이 느껴져 망망한 넓은 바다에 대해서 생각지 않게 쾌재를 외쳤다. 오사키는 뱃머리에 서서 감개무량함에 빠져 시 한 수를 지어 낭랑하게 크게 음송했다. 웅대한 뜻 호방하게 원정을 생각하니 雄心落落憶遠征 구구절절 승패를 논해 무엇하리오 區區何論敗與成 뱃머리에서 창을 가로로 들고 명월을 바라보니 舷頭橫槊對明月 푸른 파도 넘실넘실 끝없는 정 일어나네 蒼波茫茫萬里情 지사 일행은 또한 이에 화합해 각기 읊조리며 따라 하고, 구사카 도라키치는 마침내 검을 빼어 들고 일어나 춤추기에 이르렀다. 일행의 왕성한 기운은 다른 선객을 매우 놀라게 했다. 일행의 부산 도착과 활동 방침 협의 다음 날 아침 배는 부산에 입항했다. 일행은 도검 및 탄약류를 선원에게 부탁해 몰래 양륙하기로 하고 상륙하자 그곳에는 다케다(武田), 치바(千葉), 시라미즈(白水)를 비롯해 밀양에서 돌아와 요양 중인 시바타(柴田)도 병든 몸을 이끌고 함께 마중 나왔다. 스즈키, 도키자와, 우치다, 오하라는 일단 여관에 투숙하고, 오사키와 구사카는 양산박인 법률사무소에 들어갔다. 오사키가 귀국해 있던 사이에 혼마 규스케는 인천으로 가고, 요시쿠라 오세이가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어 단독행동을 취한다며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라는 소년과 함께 어딘가 여행을 간 것 외에는 동지가 모두 부산에서 학수고대하였던 것이다. 요시쿠라가 마음대로 단독행동에 나선 것에 대해서 동지들이 매우 분개하며 앞으로 요시쿠라를 만나면 먼저 그를 집을 떠난 희생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과격하게 말하는 자조차 있었다. 그러나 오사키 및 요시쿠라와 옛 친구인 구사카 도라키치는 요시쿠라의 사람됨을 말하면서 격분한 동지를 위무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동지의 대면 동지의 대면이 끝나자 곧바로 일동은 협의를 하여 서둘러 전라도 방면을 향해 출발해 동학당군에 투신할 것을 결정했다. 그 자리에서 다나카는 “창원에 금광을 경영하고 있는 마키 겐조(牧健三)에게 얼마 전 다이너마이트가 도착했는데 그 후 아직 시일이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다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탈취해 우리들의 볼일에 사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제의했다. 다케다는 “창원을 습격해 그것을 빼앗아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부산영사관의 창고에 소장하고 있는 소총과 탄약을 탈취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주장해 일동은 다케다의 말에 찬동하여 먼저 영사관 창고를 습격하게 되었다. 영사관 총기 탈취 계획과 다케다의 실패 이 모험에 나서기로 한 것은 오사키와 다케다 두 명이다. 다케다는 이전부터 무로타 총영사가 맹견을 기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주먹밥을 품속에 넣고 오사키와 함께 영사관으로 가 영사관에서 기르는 개가 묶여 있는 곳에 접근해 주먹밥을 주어 개를 길들이려고 했는데, 다케다가 접근하자 맹렬히 짖으며 물려고 했기 때문에 기절초풍하여 곧바로 뛰쳐나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다케다는 “무슨 어리석은 개인가. 아!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라고 탄식하고 오사키는 “다케다 화상은 잇큐(一休) 화상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라고 야유했다. 그날 밤 오사키와 다케다가 영사관의 창고에 몰래 들어가 자물쇠를 풀어 열려고 할 때 그 맹견이 계속해서 짖어 대며 두 명을 위협하였고 이어서 사람이 오는 기색이 있었다. 마침 그 창고와 등을 마주 대고 수십 칸 떨어진 곳이 경찰서였기 때문에 발각된다면 큰일이라며 두 명은 쏜살같이 흩어져 용두산으로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창원금광 습격을 협의 오사키와 다케다가 실패하고 철수해 오자 일동은 다시 협의를 열어 영사관의 창고털이를 단념하기로 하고, 제2단계인 다나카의 주장에 따라 창원금광의 습격을 실행하기로 결정함과 아울러 다음과 같은 수순에 따라 일행은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다. 1. 우치다, 치바, 시라미즈, 오하라, 구사카, 오쿠보의 6명은 사람 눈을 피하기 위해 육로로 부민동(富民洞)으로부터 낙동강의 다대포(多太浦)로 나와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릴 것. 1. 스즈키, 다나카, 도키자와 세 명은 남쪽 해안에서 일본 선박을 타고 우회하여 다대포로 나와 우치다 등 6명과 만나 이들 동지를 배에 태우고 마산포로 갈 것. 1. 오사키, 다케다 두 명은 하루 이틀 잔류하여 잔무를 처리하고 또 군비, 군용품을 가능한 많이 조사하고 나중에 말을 타고 마산포로 와 일행과 합류할 것. 육행대(陸行隊)의 출발과 오쿠보 하지메(大久保肇)의 어머니 이전부터 논의한 바를 기초로 다음 날 새벽 우치다, 오하라 두 명은 용기있고 늠름하게 법률사무소로 와서 일행의 출발을 재촉했다. 치바, 구사카, 시라미즈의 세 명은 이미 여장을 꾸리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오쿠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라미즈가 달려가 출발을 재촉했는데 오쿠보는 숙취 때문에 쉽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다시 오사키가 오쿠보의 집으로 달려가 이불을 말아 불러 깨웠지만 그래도 오쿠보는 눈을 뜨지 못하고 꿈결에서 무언가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곳에 오쿠보의 어머니가 와서 언성을 높여 “하지메! 하지메! 네 상태는 무엇이냐. 네가 그렇게 패기가 없이 언제까지 엄마를 울리느냐. 이 하지메! 몇 번이나 불러도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은 한심하다. 이번에 함께 데리고 가 주는 것은 더 이상 없는 명예로 생각해 엄마도 기뻐했는데 그런 것이라면 단연코 생각을 접는 것이 좋다. 너 같은 패기가 없는 자가 함께 간다면 도리어 대사에 방해가 된다.”라고 소란스럽게 이야기하고 끈덕지게 흔들어 깨우자 그 말이 비로소 꿈결의 오쿠보에게 통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베갯머리에 있는 칼을 쥐고 빨리 계단을 달려 내려가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며 “오사키 군, 잘 부탁한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뛰어나갔다. 남자보다 씩씩한 어머니는 비로소 안도를 한 듯 씩씩한 얼굴을 들어 그 뒤를 배웅하였다. 해로대(海路隊)의 출발 오사키는 다시 스즈키, 다나카 등의 숙소에 가 보았더니 이미 배의 준비가 갖추어져 남쪽 해안으로 나선 뒤였다. 따라서 배가 출발하는 장소까지 달려가서 오사키의 모습을 확인한 일행은 “육로의 일행은 출발했는가.”라고 물은 뒤 ‘그렇다면’이라고 헤어지는 말을 남기고 노 젓는 소리가 조용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다. 바로 이것은 ‘바람은 스산한데 역수(易水)는 차구나’ 하는 느낌이다. 일동용협아(日東勇俠兒)의 출발은 깨끗하면서도 용감한 것이었다. 오사키, 다케다의 출발과 시바타 고마지로의 번민 오사키는 잠시 배가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 사무소로 돌아와 잔무의 정리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전부터 일행의 기도를 알고 있었던 후지야마(藤山) 모(某)라는 상인이 엽총 두 자루와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와 건넸다. 이 잔무 정리 중 중국인으로부터 많은 돈을 편취(騙取)한 이와타(岩田) 모가 스스로 궁지에 빠져 오사키법률사무소에 구제를 청하러 온 것에 대해 오사키와 다케다가 상담을 하여 이와타로부터 군자금을 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러한 것은 여기에서 상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그때 후쿠오카의 마토노 한스케가 전신환으로 군자금을 보내왔기 때문에 드디어 여비도 갖추어져 오사키와 다케다는 마필 3두를 준비하고 통역으로 새로 니시와키 에이스케(西脇榮助)도 참가해 선발대보다 3일 늦게 심야를 틈타 준비한 물품들을 말에 싣고 사방이 잠든 부산을 뒤로하고 엄숙하고 조용하게 출발했다. 그런데 그 출발 준비가 이루어져 바로 집을 나서려고 할 때 뜻밖에도 하나의 비장한 극적인 장면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이전부터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간절히 제지당했던 시바타 고마지로가 무리하게 동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때 시바타는 초췌한 병든 몸을 이끌고 여장을 갖추고 칼을 차고 2층으로부터 내려와 침묵하면서 걸어 나가려고 하였다. 오사키와 다케다는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시바타 군,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시바타는 “귀형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선배와 지인이 다시 볼 수도 없는 출정 길에 오르는데 나만이 혼자 뒤에 머물 수는 없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심해 온 것은 오늘이 있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가령 병에 걸렸다고는 하나 헛되이 약과 친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만일 도중에 병 때문에 쓰러져 까마귀나 솔개의 먹이가 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부디 나의 마음을 살펴 꼭 동행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라며 늠연한 결사의 마음으로 동행을 요구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그는 병들어 쇠약한 몸으로 기력을 다해 앞에 서서 걸어 나가려 하였다. 그곳에 배웅을 하러 와 있던 오사키의 전 통역 니시무라 이쿠쓰구(西村幾次) 부부와 통역 니시와키 에이스케 등은 놀라서 가로막으려 했는데 시바타는 그것을 떨쳐 버리고 나아가려고 애썼다. 오사키와 다케다는 이 적극적인 동지의 심정을 생각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장한 느낌이 들어 잠시 말도 꺼낼 수 없었지만 억지로 소리를 내 “자네는 무언가 사리를 알지 못하는 사내다. 그 병으로 우리들과 행동을 함께하려는 것은 터무니없지 않은가. 지금 여기에서 무리한 것을 말해서는 곤란하다.”라면서 나무라듯이 제지한 뒤 나아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자네의 마음은 우리들도 잘 안다. 심정은 천만번 알겠지만 병든 몸으로는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들과 함께 출발하더라도 몇 리도 못 가서 자네는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길에서 쓰러져 까마귀나 솔개의 먹이가 되는 것이 어떻게 군국(君國)을 위함이 될 것인가. 그것은 자네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어제도 간절히 이야기했듯이 병이 좋아진다면 해로로 인천으로 와 우리들 일행과 행동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도 자네 한 사람을 남기고 가는 것이 무엇보다 유감임을 금할 수 없는데 비상의 경우 이것도 어쩔 수 없다. 부디 외골수로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들이 말하는 것을 수긍해 달라. 그리고 빨리 회복하여 나중에 와 달라. 우리는 단지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라고 두 사람은 눈물을 머금으면서 말을 마치고 병든 친구의 위로에 힘썼다. 마침내 “우리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후 동지로 간주하지 않겠다.”라고까지 격한 말로 열심히 설득했던 것이다. 시바타는 박아 선 듯이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머리를 숙이고 몇 차례 눈물을 훔치면서 겨우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바타 군, 우리가 말하는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였는가, 알아주었다면 우리들도 안심하고 출발할 수 있다.” 시바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는데 밤눈에도 보이게 눈물방울이 이슬처럼 땅에 떨어졌다. “그럼 갑니다. 잠시 헤어지는 것뿐이다.” 다케다와 오사키는 통역인 니시와키와 함께 각기 말고삐를 끌면서 씩씩한 태도로 걸어 나갔다. 말발굽 소리는 적막한 밤길에 점점 멀어져 갔다. 그들은 걸어서 북쪽 해변에서 초량으로 향했는데 말을 준비했으면서 일부로 타지 않았던 것은 당시 북쪽 해변 마을에 일본군이 상륙해 있어 경계가 엄중했기 때문에 그 검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기구하고 박복한 지사 시바타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가 중해져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감, 유감이다.”라고 계속 말했다고 하는데 장대한 큰 뜻을 품고 헛된 병 때문에 쓰러진 이 청년 지사의 마지막 상황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행 요시쿠라 등과 마산에서 해후 육지를 나아간 일행과 배로 간 일행은 예정대로 다대포에서 만나 그곳으로부터 배에 동승하여 다음 날 아침 새벽에 마산포에 도착했다. 일행이 함께 상륙하자 부두에서 일본 소년 한 명이 낚싯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이전에 요시쿠라 오세이가 부산에서 데리고 출발한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라는 소년이었기 때문에 이노우에를 알고 있던 오쿠보와 치바가 다가가 요시쿠라의 소재를 물었다. 그러자 요시쿠라는 이곳의 여관에 체재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요시쿠라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것처럼 동지 가운데 매우 반감을 갖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구사카는 부산을 출발할 때 요시쿠라의 일에 관해 오사키와 합의한 바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요시쿠라의 숙소를 방문해 동지 간의 의향 등을 설명하고 진의를 따져 물었더니 요시쿠라는 그 후의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행동은 모두 구사카의 의견에 따를 것이라고 답했다. 이곳에 다른 동지도 도착해 함께 아침밥을 먹은 뒤 동지가 요시쿠라를 향해 앞으로 우리들과 행동을 함께하겠는지 아닌지를 따져 물었더니 요시쿠라는 미소를 띠우며 “나는 제군들이 반드시 이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다. 제군과 함께 행동하는 것은 기정사실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일동의 마음은 갑자기 부드러워져 이로부터 동지로서 행동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날 저녁을 기해 창원금광으로 가서 광주인 마키 겐조에게 다이너마이트 제공을 요구하고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강탈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처하는 절차도 정하고 오사키, 다케다의 도착을 기다렸는데 그날 도착하는 것은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서서히 출발 준비를 하여 말 3필에 짐을 싣고 창원금광을 향해 출발했다. 이리하여 일행이 금광산에 도달한 것은 저녁 안개가 이미 사방의 산을 감싸고 황량한 정자의 등불이 깜박이는 무렵이었다. 금광산은 창원부에서 1리 정도 떨어진 산속의 금장(金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소유자는 나가사키현(長崎縣) 사람 마키 겐조로 조선 정부의 특허를 받아 이곳을 경영한 지 이미 십여 년에 이르고 그 무렵 마침 사업 확장을 기도해 다량의 광산용 다이너마이트를 일본에서 구입해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 부산의 지사 사이에 알려졌던 것이다. 창원금광에서 다이너마이트 강탈 11명의 동지가 광산사무소에 도착해 면회를 요구한 것은 마키 부자에게 적잖이 공포를 느끼게 했다. 이렇게 다수의 장사가 몰려 들어와 도망칠 방도도 없었기 때문에 마키 부자는 두려워서 거실로 불러 면회했다. 담판의 중요한 일을 맡은 것은 스즈키, 다나카, 요시쿠라, 우치다 네 명이고 다른 사람은 문밖의 한 방에서 담판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열심히 다이너마이트 제공을 청하였지만 마키 부자는 완강하게 그 요구를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저녁식사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네 명은 재고를 요구하며 일단 그 방을 나와 식사를 마친 후 협의한 뒤 일행은 숨겨 가지고 있던 무기를 꺼내 무장을 하고 다시 마키의 거실에 들어가 답변을 독촉했다. 일행의 이러한 모습을 본 마키 부자는 더욱 놀란 표정이었는데 단지 맥없이 늘어져 있을 뿐 어떻게 해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담판의 여지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때 도키자와가 발사한 권총은 굉장하게 금산의 적막을 깨뜨려 일종의 처참한 기운이 사방에 떠돌았다. 이것은 담판의 결렬을 동지에게 알리는 신호임과 동시에 한편으로 다수의 조선인 광부를 위협하여 반항 내지 도주를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총성 신호를 듣자 기다리고 있던 동지는 갱부(坑夫)들을 한 사람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데 힘쓰고, 담판위원인 우치다는 마키 부자를 붙잡아 칭칭 묶어 버렸다. 그때 구사카는 라이진(雷神) 모양을 물들인 홑겹옷의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다다미에 긴 칼을 박아 세워 마치 그림에 나오는 강도와 같은 모습으로 화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마키의 지배인인 오쿠다(奧田) 모는 다소 유도를 배웠기 때문에 일어나 반항했지만, 우치다가 장기인 유도를 통해 2~3칸 거리로 던져 버리고 나아가 그를 일으켜 세워 창고로 안내하라고 추궁했다. 창고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소량의 다이너마이트밖에 없었는데 다시 산허리에 뚫어 놓은 동굴창고 속을 찾아서 마침내 대량의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했다. 이러한 사이에 동지들은 횃불과 주먹밥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행은 탈취한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 등을 두 마리의 짐말에 싣고 마키 부자를 묶은 밧줄을 풀어 주고 인사한 뒤 오쿠다 등에게도 가볍게 인사하고 횃불을 밝혀 어두운 밤의 산길을 비추면서 유유하게 사라졌던 것이다.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小六)의 옛이야기 이날은 달빛도 없어 완전히 캄캄한 밤이었던 데다가 길은 급한 바위 비탈길로 일행의 행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매우 곤란했다. 어쩐지 하치스카 고로쿠의 옛이야기가 생각나게 하며 현재 동지 상호 간 입장을 돌아보며 지사가 고심이 많음을 다시금 느끼면서 돌에 걸리고 험한 길에 발이 미끄러져 몇 번인가 넘어지려고 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오로지 길을 서둘렀다. 아마도 광산에서 호소함에 따라 부산에서 추격자가 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철야하며 행진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심야가 되어 횃불 수를 헤아려 보았더니 불과 한두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횃불이 없어져 버리면 행진이 더욱 곤란에 빠지기 때문에 일동의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다나카 지로가 계책을 생각해 조선 대관(大官)의 야행(夜行) 관례를 흉내 내어 연도의 촌락에서 역(驛)을 잇는 방법으로 봉화를 갖춘 향도자(嚮導者)를 징발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베푸로, 베푸로’라고 연호(連呼)하여 향도자를 징발하면서 보기 좋게 행진을 계속했다. 이리하여 아침저녁에는 마침내 함안(咸安) 성안에 도달해서 한 여관에 투숙하여 각자 두세 시간 수면을 취했다. 이로써 원기를 회복하고 아침식사를 하여 배를 채운 다음 오전 8시경부터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이날은 아침부터 약한 비가 축축 내려 더위도 갑자기 줄어들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다리가 가벼워짐을 느껴 용기가 더욱 커졌다. 도중에 한 급한 비탈길을 올라 정상에 도달하여 눈 아래를 둘러보니 부근에는 인가도 보이지 않아 전날 입수한 화약의 효력을 시험하기에는 매우 적당한 장소였다. 그래서 우치다가 폭발장치를 밑으로 던지자 굉장한 폭발음이 계곡 밑에서 올라와 주변 산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켜 그 효력이 강렬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폭발 모습을 보고 조선인 마부가 두려워 놀란 나머지 급하게 그만두고 돌아가겠다고 나선 것에 매우 곤란했는데 일동이 돌아가며 이를 위무하여 겨우 따라서 가게 했던 것은 때에 따른 애교였다. 진주성의 활극 그날 밤은 초월향(招月鄕)이라고 부르는 향촌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다시 행진을 계속해 진주에 도달했다. 그 사이 조선인이 왜놈이 온다고 외치며 일행에게 욕설을 가해 용사들이 이를 응징하려고 한 일은 두세 차례 있었지만 모두 용사의 기세에 두려워하며 도망갔기 때문에 특별히 파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또 진주 시가에 들어가기 전 가토(加藤) 귀장군(鬼將軍)이 임진왜란에서 공략했다는 진주의 옛 성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먼 옛적 생각을 하게 하는 등 일행은 침착하게 여유를 가지면서 행진했던 것이다. 진주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바로 출발하려고 하는 때 문밖에 인마가 소란스럽게 행진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가서 보니 진주병사(晉州兵使)가 병사를 이끌고 교외로 나가려고 하였다. 병력 수는 약 5백 명 정도로 모두 화승총을 메고 베모자[絨帽]를 쓰고 긴 담뱃대를 허리에 차고 수건을 앞에 늘어뜨려 완연히 도바에(鳥羽繪)와 같은 일종의 이상한 풍채를 하였다. 진주병사는 55~56세로 생각되는데 반백(半白)에 비대한 호남자였는데 위풍당당하게 높은 가마 위에 앉고 병사가 이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모습은 역시 우리나라 제례 시에 다시(山車)의 본존(本尊)과 똑같았다. 우리 지사 일행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우연히 대열 가운데 병사 한 명이 일행을 보고 “왜놈이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며 동료 병사와 함께 가리키며 웃었기 때문에 다나카 지로는 분연히 앞으로 나가 대열 속에서 그 병사를 붙잡아 끌어내 주먹을 쥐고 난타를 가했다. 그런데 같이 있던 5백 명의 병사 가운데 한 명도 이를 구하려는 자가 없고 가마 위의 병사(兵使)도 침착해하며 모른 척하며 지나가 버렸다. 다나카는 이전부터 진주는 인심이 사납고 일본인에게 싸움을 걸어 괴롭히려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에 일본인의 위력을 보여 나중 사람을 위해 충분히 응징해 두려고 생각해 이와 같은 만용을 부렸던 것이다. 폭탄의 위력 일행이 시내에서 말을 모아 군수품을 정비하고 출발하려고 할 때, 관리 한 명이 와서 무슨 일인가 신문을 시도하려고 하였지만 요시쿠라가 일갈하여 그를 쫓아 버렸다. 그러자 이어서 관아에서 사자가 와서 병사(兵使)가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리고 갔다. 병사가 온다고 한다면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출발을 연기하고 있자 잠시 뒤 비단의 고운 옷을 입은 관리가 여러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요시쿠라는 전에 준비를 해 둔 의관을 꺼내 이를 착용하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그 관리를 맞이하였는데 명함을 보니 병사는 아니고 실은 일개 비장(裨將)에 지나지 않았다. 요시쿠라가 화가 나서 약속을 어긴 것을 추궁하였는데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도리어 일행의 여행 목적과 내지여행권 휴대 유무 등을 물었다. 요시쿠라는 “여권은 물론 휴대하고 있는데 비관(卑官)에게는 보여 줄 수 없다. 또 병사가 약속을 어긴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그것을 들은 다음에 공문에 대해 말하자.”라고 따졌다. 그러자 비장은 말이 궁색해져 망연해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요시쿠라는 “우리는 병사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병사의 영(營)으로 안내해 주기 바란다.”라고 요구했다. 비장은 잠시 조용히 생각한 뒤 안내를 승낙했기 때문에 일행은 여장을 갖추고 이 남자를 앞세워 아문으로 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곳은 병사의 영이 아니라 뜻밖에도 포도아문(捕盜衙門)이었다. 일행의 용사는 속았다는 것을 알자 분해하며 그 비장을 힐책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이미 도망가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완전히 여우에게 홀린 상태로 일동은 망연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돌계단을 올라 정전으로 가서 안내를 청해 보았지만 병사는 물론 잡병 한 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금 섬뜩함을 느끼고 있던 중 때마침 굉장한 한 발의 포성이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놀라서 돌아보니 보루 위에 설치되어 있는 대포 주변에서 자욱하게 화약 연기가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인 관리들이 일행을 놀라게 해 도망가게 하기 위해 대포를 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행은 조금도 소란스러워하지 않고 짐말에 실었던 화약을 꺼내 둑 위에 있는 큰 버드나무 두 그루를 선택해 그 밑동에 그것을 장치해 도화선에 점화한 뒤 5~6칸 뒤로 물러나 폭발을 기다렸다. 그러자 부근에 모여 있던 성 주민들은 일행이 대포 소리에 겁먹고 도망친 것으로 오해하고 목소리를 높여 조소하면서 “그렇지, 놓치지 말라.”라며 몰려왔다. 마침 그 순간에 수많은 번개가 일시에 떨어지는 것처럼 큰 소리와 함께 흰 연기는 모래 먼지를 날리면서 자욱하게 하늘에 충만했다. 그 공포스러운 광경에 매우 놀란 성 주민들은 쓰러지고 기며 우왕좌왕 있는 대로 매우 낭패한 모습을 보이며 도망을 쳤다. 폭파한 흔적은 지면을 깊이 파 들어갔고 두 그루의 버드나무는 부서져 호(濠) 안으로 날아가 참담한 광경을 드러냈다. 보루 위에서 발포한 병사들도 이를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도망쳐 부근에는 완전히 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행은 서로 돌아보고 웃음을 나누면서 다시 숙소로 돌아와 여장을 꾸린 다음 유유히 서쪽 전라도를 향해 출발했다. 때는 1894년 7월 3일이었다. 그날 밤은 단성읍(丹城邑)에서 반 리 정도 떨어진 단촌(丹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하려고 할 때 수십 명의 폭민이 모여 통행을 방해하려 했으나 일행은 개의치 않고 이를 돌파해 나아갔다. 더구나 그날은 이와 같은 일이 여러 차례나 반복되었다. 이는 진주병사가 전날의 보복을 하려고 불량스러운 무리를 사주하여 폭행을 가하려고 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데려간 조선 마부는 이를 두려워해 자주 쉴 것을 청했고 네 명 가운데 두 명은 마침내 떠나가 버렸다. 이러한 일이 행진에 방해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무엇보다 일행을 초조하게 한 것은 이미 여비가 소진되어 버렸는데 뒤에서 올 예정인 다케다와 오사키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더운 길을 걸어 피로해하며 산청군읍(山淸郡邑)에서 1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일행은 둑 위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면서 잠시 협의에 들어갔는데 누구라도 별다른 묘안은 없었다. 젊고 왕성하고 기백이 날카로운 우치다는 그때 의기가 앙연하게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사람을 쳐 죽이고 강도를 할 수밖에 방도가 없다. 그러나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 다년간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른 탐악한 관리에 대해 이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분에서 아무런 의(義)를 손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의했다. 그러자 스즈키 덴간이 이 말에 찬성하여 중의는 순식간에 결정되어 우치다와 오하라가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산청 군아의 낮 강도 산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치다와 오하라는 이 비상 임무에 종사하기 위해 군아로 향했는데 앞서 어디엔가 외출을 했던 요시쿠라가 돌아오는 것을 만났다. 요시쿠라는 두 사람에게 “지금은 틀렸다. 틀렸다.”라고 말했다. “너는 어디에 갔었느냐”라고 두 사람이 묻자 “군수는 지금 죄인을 심문하고 있으므로 시점이 좋지 않다.”라고 답했다. 우치다는 웃으며 “강도를 하러 가는데 상대방의 사정을 물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요시쿠라도 독촉해 군아로 서둘러 갔다. 용사의 겸연쩍음 아문에 도착하자 다수의 경비 관리가 문을 지키고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치다와 오하라는 제지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무리하게 밀고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 관리가 붙잡으려고 급히 다가왔는데 우치다는 장기인 유도로 경비 관리를 공처럼 한 명 두 명 계속해 던져 버리고 뛰는 토끼와 같은 기세로 문안으로 돌진했다. 이어서 오하라, 요시쿠라가 돌입해 문 주변은 갑자기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소동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던 죄인은 혼란을 틈타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우치다는 청(廳) 안의 모습을 보았는데, 군수는 반드시 정면의 발 안쪽에 있는 것으로 보고 칼을 뽑아 발을 걷었더니 그곳에는 군수가 차분하게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우치다를 보자 유유하게 붓을 들어 “제군은 어떠한 용건이 있어 왔는가. 멀리서 온 노고에 감사한다.”라고 써서 보여 주었다. 요시다는 다소 조선어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귀국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해 도한한 자이다. 그런데 지금 여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빌리기 위해 내방한 것이다.”라 말하자, “그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라고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즉각 그대들의 숙소로 가져갈 것이다.”라고 답하고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수의 여유 있는 태도를 접하고 우치다는 차고 있던 칼이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되고 권총을 겨누고 있던 오하라도 역시 맥이 빠져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요시쿠라는 기지를 발휘하여 “이와 같은 무기가 귀국에 있는가.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더니 군수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아니, 매우 훌륭한 진품(珍品)을 보았다. 부디 거두어 주시오.”라고 말해 그에 응수했기 때문에 두 사람도 겨우 무기를 거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 명은 깊은 감사를 말하고 숙소로 돌아오자 요구한 돈은 이미 군수의 사자가 지참하고 있었다. 그날은 산청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은 운봉(雲峯)까지 나아가 현관(縣官)의 후의를 받아 관아에서 숙박한 다음 다시 전라의 대도회지인 남원(南原)을 향해 출발했다. 오사키 등의 출발과 마키 겐조의 아들 그런데 일행보다 늦게 부산을 출발한 오사키, 다케다, 니시와키는 동지의 뒤를 쫓아 나아가는 사이에 뜻밖에도 창원금광산의 마키 겐조의 아들 모와 해후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다케다가 그에게 말을 걸자 모는 당황하며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그 거동으로 비추어 보아 선발대가 그 광산을 덮쳐 폭약을 탈취한 것을 알아챘음과 동시에 마키의 자식이 부산총영사관에 호소하러 가는 도중에 뜻밖에 자신들과 만난 것이라고 상상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보고 드디어 앞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 도중에 진주에서는 또다시 조선 관헌의 방해를 받아 이전과 같은 포성 위협 등도 받았는데 오사키의 절충이 잘되어 관헌을 설득시키고 폭민들의 시위적 행동도 견디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주 시가를 떠나려는 무렵부터 폭민이 뒤따라와 빈번히 투석을 하여 자칫하면 돌멩이의 희생이 될 수 있는 위험에까지 빠지게 되었는데 권총을 발사해 폭민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남강(南江)을 건너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오사키 등의 추궁 일행은 산청읍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전날 밤 일본인 11명이 숙박하고 오늘 아침 남원을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 빠르게 전진하는 사이 남원성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는 지점에서 선발대가 가는 것을 확인하고 기를 흔들고 소리를 질러 신호를 교환하면서 빠르게 뛰어가 마침내 따라붙었다. 남원의 숙사 교섭사(交涉使) 서로 무사함을 축하하고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드리는 등 필설(筆舌)로 다하기 어려운 기쁨으로 서로 만났다. 이때 요시쿠라와 도키자와는 일행을 대표하여 여관 알선을 요청하기 위해 관아로 가서 부재중이었는데, 이윽고 두 사람은 관아의 비관(卑官) 두 명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관아에 교섭하러 갈 때에 요시쿠라는 전권공사 육군 대장이라고 칭하고, 도키자와는 육군 중좌라고 칭하여 그 종자인 체 가장하고 함께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요시쿠라의 분장을 말하면 에보시(烏帽子)를 쓰고 녹색 하카마(袴)에 자색 히타타레(垂直)를 입어 신관(神官)이라고 해도 좋을 복장을 하였다. 도키자와는 육군 중위의 복장으로 늠연(凜然)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오사키, 다케다의 안착을 축하한 뒤 두 명의 조선인 비관은 숙사를 안내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제 모두 함께 남원으로 들어가자며 일동을 독촉했다. 일행이 남원 시내로 들어가자 시내의 조선인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서로 이야기하며 구경하는 것을 안내하는 두 명의 비관이 질타하여 길을 열면서 이윽고 큰 누문 앞으로 안내했다. 남원 군아(郡衙)의 환대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문은 이미 열려져 있어 바로 문안의 굉장한 건물로 인도되었다. 이곳은 칙사를 향응하는 객전(客殿)으로 세워진 것이어서 상당히 장려(壯麗)하였다. 일행에 대한 대우도 역시 친절하고 매우 공손했다. 아마도 요시쿠라가 자신을 육군 대장 전권공사라고 칭한 책략이 성공하여 남원부사가 마음으로부터 존경을 표한 결과일 것이다. 일동이 들어간 넓은 방에는 벽에 광한루(廣寒樓)라고 적은 액(額)이 걸려 있고 또 별도로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편액도 걸려 있었다. 이윽고 부사로부터 차관이 여러 명의 관인을 거느리고 심부름하는 남자 하인에게 술과 안주를 운반하게 하고 내방했다. “부사는 병중으로 방문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비관이 대신해 제군이 멀리서 온 노고를 위로하는 바이다. 이를 양해하고 여기에 바치는 보잘것없는 술과 안주를 받아들이신다면 다행이다.”라고 인사하며 가져온 향응 물품을 늘어놓고 권했다. 술은 남원 명산의 죽주(竹酒)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나무를 원료로 양조해 매년 국왕에게 헌납하는 것이 관례인 향기와 맛이 좋은 것이고 안주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비롯해 명물인 밤까지 섞어서 조리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생하며 결핍된 여행을 계속해 온 일행에게는 바로 혀끝을 자극하기에 족한 성찬이었다. 일행 지사는 차관 등이 권하는 대로 마시고 또 먹고 술에 취해 널브러질 때까지 낭랑하게 시를 음송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어나 검무(劍舞)를 추는 자도 있었다. 마침내는 군가를 크게 불러 용기를 북돋는다는 모양으로 크게 즐거움을 다했다. 요시쿠라, 대관의 환대 그런데 전권공사 육군 대장이라는 이름의 요시쿠라만은 에보시와 히타타레의 예복을 입고 차관과 대좌하여 시종 위엄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신묘(神妙)하게 정좌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운 입장에 있었던 것은 불쌍했다. 차관 등이 물러간 무렵에는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도 이미 다 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엄숙한 예복 때문에 폭포와 같이 땀을 흘려 전신이 홀딱 젖어서 물속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인생을 그르쳐 대장의 몸이 되지 말라. 일체의 행복이 남에게 뒤떨어진다.”라고 하였다. 일동은 그것을 듣고 왈칵 웃음을 터뜨렸다. 남원회의 옥루금전(玉樓金殿)이라고도 불리는 칙사향응전(勅使饗應殿)의 편안한 하룻밤의 잠은 며칠 동안의 피로를 다 씻어 주어 다음 날 아침은 모두 활기 있게 일어났다. 그곳의 관아로부터 아침식사를 운반해 왔는데 식후 곧바로 회의를 열고 앞날의 행동에 관해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동학당 방문 준비 동지가 기하는 바는 동양의 평화이다. 그리고 동양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조선으로부터 청국 세력을 일소할 필요가 있다. 청국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일청 사이에 전쟁을 일으켜 청국의 횡포를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조선은 조야 공히 청국을 세계에 비할 바 없는 강국으로 오신(誤信)하고 스스로 청국의 번병(藩屛)이라고 칭하며 득의양양한 상황이다. 그 무지는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인데 종래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연약하였던 점이 그 원인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부디 일청 사이에 전단(戰端)을 열게 해 조선 조야의 오신을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동지들이 동학당과 회견하는 것도 여기 이삼 일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방침으로 절충해야 한다. 동학당의 최근 상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전해져 어느 것이 진실인지 쉽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데, 우리는 지금 이 안전지대에 머물 수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그들의 동정을 탐지하고 그 정세를 상세히 파악하고 전진함이 옳다. 또 그 사이에 가능한 공격과 방어를 위한 무기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학당도와 회견할 때 제시할 격문도 이번에 기초(起草)해 두어야 한다. 회의 석상에서 동지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이상과 같은 것으로 결국 동학당의 동정을 탐지하기 위해 다나카 지로, 도키자와 우이치, 치바 규노스케, 오하라 요시타케 등 네 명이 통역인 니시와키 에이스케와 함께 출발하고, 우치다 료헤이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탄 제조의 임무를 맡고, 구사카 도라키치는 척탄(擲彈)의 제조에 종사하고, 오사키 마사요시가 이 두 명의 조수를 맡고, 스즈키 덴간,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 세 명은 마당 앞의 큰 연못 속의 섬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이라고 칭하는 작은 정자에서 격문의 기초에 종사했다. 오쿠보 하지메는 경위 담당으로서 칼을 들고 사방팔방을 배회하면서 경계에 힘썼다. 그때 우치다, 구사카, 오사키 세 명이 폭탄 및 척탄의 제조에 열중하고 있는 곳에 조선인이 다수 몰려와 방관하고 그중에는 연초를 피우면서 다가오는 자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또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쫓아 버려도 또 순식간에 모여들어 중요한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 우치다는 “어쩔 수 없는 놈들이다.”라고 말하면서 응징하기 위해 조선인 한 명을 붙잡아 유도 솜씨를 부려 목 밑을 졸라 가사 상태에 빠뜨렸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조선인은 “죽었다.”라고 소란을 부렸는데 우치다는 이윽고 시간을 지켜보고 급소를 찌르자 조선인은 ‘응’ 하고 호흡을 내쉬면서 무아몽중(無我夢中)에 수십 칸을 달려 나갔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동지들은 뜻밖에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에 간담이 빠진 조선인들은 두려워하며 접근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무사히 폭탄 제조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격문 기초와 천우협의 명칭 저녁 무렵이 다가와 정찰대의 다나카 등이 돌아왔을 때는 폭탄 제조도 끝났고 격문의 기초도 역시 드디어 끝났다. 정찰대가 가지고 돌아온 보고에 따르면, 동학당도는 전주를 점거했을 때 아산에 상륙한 중국군이 관군을 도와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할 수 없어 그곳을 패퇴해 다시 병사를 결집해 순창(淳昌)의 군아를 덮쳐 이를 공략하고 그곳에 자리 잡고 재봉기를 꾀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날 격문의 기초와 함께 단체 이름을 천우협(天佑俠)이라고 칭하기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고생을 견디며 찾아온 동학당의 본거인 순창이 겨우 6리 이내의 거리에 지나지 않아 드디어 활약의 시기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일행의 의기는 매우 높아졌다. 다음 날 아침은 얄궂게도 축축하게 비가 마당 밖에 조용히 흩뿌리고 있었다. 게다가 동지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출발할 무렵에는 비의 기세가 점차 거세진 데다가 바람도 더해져 행로의 어려움이 염려되었지만 일동은 짐말 가운데에 끼어서 긴장된 모습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2리 정도 전진했을 때 스즈키 덴간이 열이 나서 보행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그가 폐질환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동지는 매우 우려했다. 그렇지만 기가 센 스즈키는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용기를 북돋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억지로 일행이 늦지 않도록 하는 모습이 비장하였다. 그러나 동지들은 스즈키가 비에 젖으면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애처로운 모습을 볼 수 없어 짐 속에서 모포를 꺼내 스즈키에게 입히고 강제로 말을 타게 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다시 2리 정도를 전진한 곳에서 한 잔정(棧亭)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고 스즈키도 따뜻한 방에 들여보내 젖은 몸을 말리면서 컨디션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다케다와 요시쿠라는 별실로 들어가 격문의 청서(淸書)에 착수했다. 이때 마침 조선인 한 명이 들어와 “순창에 있는 동학당의 군은 약 5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하고 갔다. 그래서 일동은 회의를 한 다음, 먼저 오하라 요시다케, 다나카 지로 두 명을 동도(東徒)의 상태를 탐색하기 위해 먼저 보내고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다시 스즈키를 말에 태우고 전진의 길에 올랐다. 천우협도 순창에서 동학당 진영을 방문하다 일행이 순창 교외에 도달한 것은 황혼이 가까워졌을 때인데 시가에 근접했을 때 다리 위에 서서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다나카와 오하라였다. “동학당군으로부터 특사를 보내 우리들에게 서장(書狀)을 가지고 와서 수취하고 기다리던 참이다. 그 특사가 두터운 예를 갖추고 우리에게 대하는 바를 보면 우리들 일행을 환영하는 모습이다. 그 서장은 아직 펼쳐 보지 않았는데 깊이 그 정에 감사하고 뒤에 오는 동지의 도착을 기다려 회답하겠다고 알리고 돌아가게 했다. 그 사자(使者)는 돌아가면서 시내 입구에 숙사를 정해 둘 것이므로 속히 와서 피곤한 몸을 쉬라고 알리고 돌아갔다.”라며 기운이 나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그 숙사로 가서 서장을 펼쳐 보고 그런 다음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시가로 들어가자 과연 동학당의 당도(黨徒)가 숙사를 정하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그들 당도는 염주를 손목에 걸면서 나아가 일행을 위해 짚신 끈을 풀어 주거나 물을 퍼 와서 발을 씻게 하는 등 그 태도는 매우 친절하고 정중했기 때문에 일행은 의외의 친절한 대우에 오히려 망연할 뿐이었다. 이윽고 식사를 끝내고 서장을 펼쳐 보니 그 문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도의 환영문 귀국 대인 각위(各位). 만 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격지(隔地)에 왕림하시고 열풍(熱風)과 화우(火雨), 긴 여정의 노고에 정말로 황송함을 금할 수 없다. 제공(諸公)이 이곳에 온 목적은 모른다. 본디 대명(大命)을 띠고 패배한 우리 당인을 만사(萬死)에서 구하기 위함인가, 애초에 달리 기약하는 바가 있기 때문인가. 교시를 준다면 매우 다행이다. 우리 당인은 전에 탐관오리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걸 참고 견디지 못하여 하루아침에 갑자기 원망하고 소(訴)를 외쳐 무리를 만들어 전주로 들어갔다. 뜻은 오로지 백성과 함께 그 부침을 함께함에 있었다. 뜻하지 않게 성 위에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 굳이 우리 1천여 명을 사살했다. 지극히 원통하고 분함을 지금 호소할 곳이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망하는 백성을 가리켜 마침내 반역을 꾀하는 무리라고 말하고 방백과 수령이 모두 창과 검을 갈아 우리 당인을 요격하고 오살(鏖殺)하려고 한다. 천하의 무고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으리라. 이것은 실로 여러분들에게 불쌍히 여길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또 우리 당인은 본래 덕을 밝히고 도(道)를 말하는 것을 주의로 삼는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병마(兵馬) 사이에서 구축(驅逐)한다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무고한 백성을 해친 일이 없다. 그 기율의 정연함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은 스스로 경군(京軍)보다 우위에 있을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제공이 만일 우리 진문(陣門)에 왕림하여 어리석고 몽매함을 계유(啓諭)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어떠한 의심이 있을 것인가. 어떠한 주저함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들은 자리를 깨끗이 하고 삼가 제공의 광림을 기다린다. 동학당의 전법 동학당에서 일행이 오는 것과 그 목적이 동학당 원조에 있다는 것 등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일까? 원래 동학당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기껏해야 사냥꾼으로부터 긁어모은 화승총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관군은 레밍턴의 원입총(元込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투력의 우열은 거의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학당은 전주에서 중국군의 참가 때문에 타파당할 때까지 관병에 대해 연전연승하고 도처를 풍미하였는데, 그것은 동학당이 특수한 전법으로 10리~20리의 광범위에 걸쳐 마치 거미줄같이 팔방에 밀정망을 펼치고 신속하고 기민하게 첩보의 연락을 취해 본군(本軍)을 향해 적의 상황을 자세하고 빈틈없이 알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던 결과였다. 그 첩보는 매우 민활하고 신속하여 원근의 적의 상황을 손에 잡히는 것같이 알 수 있었다. 이리하여 동학당군은 적의 세력이 미약한 곳을 습격하고 우세한 장소에는 불의에 타격을 가해 신출귀몰한 활약을 연출하여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동학당이 무엇보다 장기로 삼는 전술이었기 때문에 이 밀정망에 의해 천우협 지사가 오는 것 등은 10리 이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창원금광산 습격 소식이 사방에 전해지자 동시에 천우협의 행동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도(黨徒)와의 첫 회견 그런데 일단 여관에 자리를 잡은 동지는 동학당에 회답하기 위해 그날 밤 다나카, 오하라, 다케다, 요시쿠라에게 통역인 니시와키를 붙여 그 본영인 순창 군아로 가게 했다. 다섯 명은 안내자로 배치된 동학당도 한 명의 안내를 받아 본영에 들어가자 계단 위에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윽고 동도의 간부로 생각되는 여러 명이 나타나 응접했다. 일동의 자리가 정해지자 먼저 다나카 지로가 입을 열어 “우리들 협도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온 것은 멀리서 동학교도가 의(義)를 중시한다는 것을 듣고 함께 말하고 함께 모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꾀하는 바는 주장(主將)에 대해서이므로 주장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바라건대 그 성명을 알고 싶다.”라고 말했다. 니시와키가 그것을 통역하자 복장은 그다지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눈빛이 반짝거리고 풍채가 무리 중에 뛰어난 한 명의 교도가 앞으로 다가와 “원래 우리 당인은 상하귀천의 차별을 두고 있지 않다. 함께 일을 하는 자는 모두 동등하고 같은 권리가 있는 교도이다. 이 자리에 있는 자는 동교(同敎)의 동지인 자이고 다른 뜻을 품는 자는 없기 때문에 꺼리는 바 없이 당신들의 주장을 말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시쿠라가 품속에서 격문을 꺼내 그 교도에게 넘겨주자 교도는 한 번 절하고 그것을 받아 다른 교도에게 건네 낭독하게 했다. 천우협 격문의 대의(大意) 지금 그 원문의 대의를 분서(分序)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해산만리(海山萬里) 갖은 고생을 개의치 않고 특별히 와서 스스로 여러분들을 방문한 까닭은 오직 여러분들이 의(義)에 의거해 대도를 바탕으로 왕가가 쇠하는 것을 흥하게 하고 백성의 유리(流離)를 구하려고 하는 뜻에 감격해 동지 14명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을 버리고 죽음으로 부모의 나라를 달려나온 것이다. 일본과 조선은 원래 동조동문(同祖同文)의 나라라고 말한다. 인의(隣誼)의 정이 그 존망에 대해 묵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해관계가 이미 직접적이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또한 의를 보고 흥분하는 것이 이와 같다. 여러분들에게는 즉 선조 분묘의 땅이다. 그 나라를 위해 지극한 정성으로 충성을 다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할지라도[至誠盡忠 粉骨碎身]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제민(濟民)의 거(擧)는 원래부터 불가한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제민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가벼운 거동과 폭동은 가장 삼가해야만 한다. 아니, 이와 같은 것은 쓸데없이 대사를 그르쳐 대기(大機)를 잃는 데 지나지 않는다. 선현이 말하기를 일에 임해 두려워하고 모의를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실로 제공이 비추어 보아야 할 바이다. 따라서 은밀히 생각하기를 현재의 세상에서 나라에 임하는 자의 급무는 사방의 형세에 대해 자가(自家)의 지위를 생각하고 정세를 파악하고 적을 파악함으로써 천하의 기세(機勢)에 응해 생민을 편안하게 함과 동시에 사직의 공고함을 꾀해야 한다. 만일 이 말을 되돌아보는 것이 없다면 나라가 무너지고 집이 망하는 것이 반드시 순년(旬年)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셋째, 천하 금일의 형세는 우승열패의 각축 상황으로 그와 같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안위 존망이 어찌 이때가 아닌가. 그리고 현재는 형제가 안으로 싸우고 호랑이와 이리가 밖에서 엿보는 것이 많다. 지사가 나라에 몸을 바쳐 만세태평의 기초를 세우는 것을 오늘이 아니고 그 어느 날을 기다릴 것인가. 넷째, 조선의 시폐는 상하 일반 유안고식(偸安姑息)하여 과거 일념으로 국가의 존망을 생각하는 자가 없는 데 있다. 특히 위에 있는 자로는 재상 이하 지방 수령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앞다투어 사적인 것을 챙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주음락(詩酒淫樂)을 접한다. 지금 이것을 고쳐 강건한 국풍을 양성하고자 한다면 혁명은 실로 제일 수단일 것이다. 다섯째, 한 줌의 흙도 이씨의 천하이다. 한 사람의 백성도 선왕의 백성 자손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을 쪼개어 러시아에게 주고 이 백성으로 하여금 해마다 잇달아 오랑캐 땅으로 유망(流亡)시키는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민씨 일족의 실정 흔적이 실로 이와 같다. 그 죄악은 단지 그 폭렴(暴斂)에 그치지 않고 따로 선왕을 욕보이고 사직을 해치는 것이다. 지사가 어찌 이를 묵시할 것인가. 여섯째, 단지 그것에는 본말이 있다. 지금 지방 관리의 학정이 민가(閔家)의 뇌물정치로부터 오는 것은 공들이 원래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인민 질고의 원인이 되는 것은 공들도 역시 민가라고 말하며 민(閔)의 죄가 지방 수령보다 무겁다고 하는 것도 사리상 당연한 논리이다. 공(公)들의 명지안식(明智眼識)이 이미 이와 같다. 그렇다면 즉 민씨의 죄로 인해 오는 것 역시 밝히기 쉬울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죄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민족(閔族)의 악정 배후에는 그 수호자로서 청국 사신 원세개(袁世凱)가 있다. 원은 실로 민씨의 악을 도와 그 죄를 크게 하는 본존이다. 더구나 공들은 함부로 그 적수(敵手)에 원대인(袁大人)이라는 존칭을 부여하고 그 적국에 조국(祖國), 상국의 좋은 이름을 바친다. 우리 무리는 속으로 공들이 현명하면서도 이와 같은 어둡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일곱째, 요컨대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수령, 수령의 원악(元惡)은 민족(閔族), 그리고 민족 악정의 근원은 원세개와 그 본국에 있다. 이것은 천하 모든 사람의 공론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성으로서 금일의 도탄에 괴롭게 만든 자는 저 청국이 아니고 누구인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한다. 공들이 그 칼날을 청과 원세개에게 가하는 것을 잊고 오로지 민(閔)과 수령에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을. 아니, 공들의 의거가 겨우 이와 같은 것에 그친다면 이것은 낮에 하나의 민(閔)을 죽이고 저녁에 하나의 민(閔)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백성의 고통, 천하의 화근은 어느 때에 능히 이를 모두 소탕할 것인가. 여덟째, 하물며 공들은 단지 한토(漢土)의 명조(明朝)시대의 은혜를 기억한다. 그리고 현재 조선에 대해 청국이 큰 화심(禍心)을 품고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과거 원세개가 호언하는 바를 듣지 않았는가. 3년 뒤 우리는 반드시 조선을 우리 판도로 삼고 그 왕을 폐하여 서민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아! 대역무도(大逆無道) 불구대천(不俱戴天)의 말로 신하는 당연히 분개하여 절사(節死)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섭지초와 섭사성 두 장수는 그 야심 실행의 선봉이 되어 이미 바다를 건너와 아산의 진영에 있다. 과연 그러하구나. 원세개가 억지로 무도의 정부를 도움으로써 공들의 안민근왕(安民勤王)의 군사를 초멸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아홉째, 가족이 있음을 알고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민(閔)은 섭지초와 섭사성 두 장수가 와서 아산에 주둔하는 것을 기화로 이에 아첨하여 그 폭정의 원병으로 삼으려 한다. 그리고 국왕 전하의 예려(叡慮)를 괴롭히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들 세 명은 실로 조선의 범과 이리이다. 공들이 민(閔)을 토벌하는 데 있어 먼저 아산의 청병을 소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째, 민족이 조정에 있고 청나라 사람이 밖에서 이를 원조한다. 이와 같다면 충의 있는 신하가 도저히 세상에 나오는 것을 기할 수 없다. 금일 재야에 유현(遺賢)이 많고 풍년이 들었지만 사민이 굶어 얼굴색이 파란 것의 원인은 오로지 여기에 있다. 열한째, 그러나 일본 국민은 그렇지 않다. 공들이 길게 그 안민흥국(安民興國)의 뜻을 지속하고자 하면 가능한 한 진력함을 아끼지 않는다. 의협(義俠)은 실로 우리 제국 3천 년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열두째, 그러므로 공들이 우리 무리의 말하는 바를 듣는다면 우리 무리는 흔연히 지금부터 공들의 선구가 되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검인(劍刃)을 물리치며 북진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길을 열고 쓰러질 때까지 전력을 다한다면, 저 아산의 청군이 설령 매우 많은 무리라고 칭하더라도 일격하여 기세를 꺾는 것은 쉬울 뿐이다. 어떤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당도(黨徒)의 감격 격문을 낭독하는 가운데 민족(閔族)의 횡포, 국태공(國太公) 운운하는 부분에 이르자 열석한 교도를 비롯해 옆방에서 듣고 있던 교도들은 분함을 느껴 손을 들고 어깨를 때리고 그중에는 일어나 자리를 밟고 소리 지르는 자도 있어 비장한 기운이 갑자기 자리에 차고 의기가 북받쳐 힘이 넘치는 기운이 바로 하늘을 찌르는 기개가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주장으로 보이는 한 교도는 말을 고쳐 “여러 현사의 높은 가르침을 삼가 잘 알았다. 자세한 것은 내일을 기해 꾀하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연일의 행로에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와서 높은 가르침을 아까워하지 않는 높은 뜻과 두터운 정은 매우 감사하고 부족함이 없다.”라고 감사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 명하자 준비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 그것을 다섯 명 앞에 배열하고 “보잘것없는 술과 안주가 여러 현사를 대접하기에 부족하지만 바라건대 단지 우리의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인사했다. 다섯 명은 그 호의를 받아 거나하게 취해 물러가려고 할 때 교도는 “당신들의 숙소는 좁고 더럽고 불편할 것이므로 당 관아의 두 방을 비워 여러 현사에게 제공하고 싶다. 속히 이동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미 밤도 깊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섯 명은 내일 후의에 따를 것이라는 뜻을 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열석한 교도의 면면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잠시 배웅하였다. 돌아온 다섯 명으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은 동지들의 만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진기한 천우협도의 예복 다음 날 아침은 스즈키 덴간도 활기 있게 일어나 “병이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 오늘 아침은 그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제군은 안심해 달라.”라고 의기양양함을 보였다. 일동은 아침식사 후 동도로부터 사자의 마중을 받으며 군아 안의 숙소로 이전했다. 이때 덴간이 짐말에 걸터앉아 대장인 척하며 새 숙소로 가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일동에게 환하게 웃는 웃음을 이끌어냈다. 일행에게 제공된 것은 다다미 20장 정도의 방 하나와 10장 정도의 방 하나로 넓기도 하고 청결하기도 하였다. 남원 이래 매일 더러운 여관 방에서 티끌과 빈대라는 독충에게 습격을 당해 고통스러워했던 일행에게는 어쩐지 마음을 상쾌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어서 동학당 본부로부터는 “즉각 간부가 와서 뵐 예정이었는데 지금 죄수를 신문 중이기 때문에 신문을 마치는 대로 와서 뵐 예정이다. 잠시 기다려 달라.”라고 말했다. 죄수의 신문이라는 것은 전에 군수 등이 죄인으로 붙잡아와 투옥한 상태로 도주한 자를 끌어내 간부가 심문하고 있는 것으로, 동학당은 이렇게 점령지 도처에서 억울한 죄로 우는 인민을 석방하는 인도(仁道)를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지나자 방금 찾아뵙겠다는 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협도 일행은 의복을 고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복이라고 하는 것은 구사카가 라이진(雷神)이 큰 북을 치고 있는 모양을 염색한 유카타(浴衣)를 입고, 다나카는 조선식 앞치마[袴]에 중국 윗옷 그 위에 일본 하오리(羽織)를 걸친 것으로 삼국을 절충한 것이고, 다케다와 우치다는 순양복, 스즈키는 순일본복, 요시쿠라는 항상 입는 금포자과(錦袍紫袴)를 입고 에보시를 썼고, 도키자와는 육군 장교의 약식 제복으로 가슴에 훈장이 빛났다. 각인각색으로 정말로 백귀야행(百鬼夜行)의 느낌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군의 간부로서 내방한 자는 총 인원이 10여 명으로 서로 이름을 적어 교환하고 운반해 온 술과 안주를 사이에 두고 환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자리에서는 깊은 기밀에 관한 이야기도 없고 친목의 정을 다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때 일행은 동학당으로 하여금 더욱 큰 신뢰를 갖게 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 물속에 던져 보였다. 다이너마이트가 갑자기 폭발해 물안개를 높이 올린 것을 목격한 동학당 사람은 매우 놀라며 불을 물속에 넣어 꺼지지 않을 리가 없는데 일본인은 실로 불가사의한 것을 한다며 서로 찬탄을 하였다. 또 동학당의 한 부장(部將)으로 유난히 우람한 체격을 갖고 용력(勇力)이 비범해 총알이라 하더라도 이자의 몸을 뚫을 수 없다고 미신(迷信)하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우치다가 이 남자와 힘을 겨루게 되어 처음에는 멋지게 날려 버리고 두 번째는 급소를 찔러 기절시키고 다시 급소를 만져 소생시켰기 때문에 당군 용사들은 경탄을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오히려 다이너마이트 이상의 효과를 보였던 것이었다. 그 밖에 부상병이 있는 것을 보고 상처를 석탄산으로 씻고 그 뒤는 약을 발라 치료를 베풀었다. 이러한 일들에 따라 동학당은 협도에 대해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천우협 대표와 전봉준의 필담 이 낮 동안의 상호 간 환대에 이어 다시 저녁 무렵이 가까워지면서 동학당 측으로부터 교섭이 있어 그 대표자와 협도 측 위원이 비밀리에 협의를 하기로 하였다. 스즈키, 다나카, 다케다, 오사키의 네 명이 여기에 나섰다. 교도 측에서 출석한 것은 모습이 훌륭하고 당당하여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는 뛰어난 사나이 단 한 명으로, 그가 주장(主將)인 전봉준(全琫準)이었다. 전봉준은 네 명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통역을 물리치고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할 것을 요청하고 바로 붓을 잡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동학당은 하나의 교단으로 천지의 대도를 주장하고 대의를 말함으로써 이를 실행하고 있다. 우리들의 이번 행동은 오로지 이 주의에서 나왔고 쓸데없는 폭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다케다는 “우리들도 역시 일본의 동학당이다. 그 주의로 삼는 바는 귀하가 적은 바와 다르지 않다.”라고 적어 보여 주었다. 전봉준은 다시 붓을 잡아 “당신의 뜻은 알겠다. 우리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도대의, 즉 오로지 하늘의 뜻[天意]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도는 하늘의 뜻이 있는 곳을 잊지 않기 위해 평생 읊는 주문이 있다. 우리 교도는 항상 이를 창송하기 때문에 이에 활기가 생기고 사지(死地)도 역시 생지(生地)와 같다. 귀당도 역시 이와 같은 주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다케다가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주문은 없지만 우리 일본의 신도를 근본으로 삼고 유ㆍ불ㆍ선 3교를 통해 이를 보완하고 이를 오랜 세월 연구 연마함으로써 일정하고 움직일 수 없는 주의를 세워 활천활지(活天活地)의 운동을 하여 왔다.”라고 답하자 정독하고 수긍하여 그로부터 일문일답을 거듭해 서로 시세를 논하여 피아 필담은 끝날 줄을 몰랐다. 원래 다케다는 화한(和漢, 일본과 중국)의 학문에 통하고 불교에 조예가 깊고 특히 한문을 가장 장기로 삼는다. 종횡으로 문자를 구사하여 즉석에서 명문장을 만드는 수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필담에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게다가 스즈키 덴간이 옆에서 의견을 말하여 다케다의 뜻을 보족(補足)하였기 때문에 문장이 더욱 청채(淸彩)함을 발하고 문세(文勢)는 흡사 용음호소(龍吟虎嘯)의 경향이 있었다. 전봉준도 역시 조선인 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능문가(能文家)였는데 다케다에 비하면 오히려 손색이 있음을 면할 수 없었다. 이 필담은 바로 소책자로 만들기에 족한 분량에 달해 적당히 기념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스즈키가 이를 휴대하고 돌아갔던 것인데, 나중에 혼마 규스케가 고향인 니혼마쓰(二本松)로 휴대하고 돌아가 마침내 그 소재가 불분명해지게 되었다. 양자의 맹약과 방략 이 중요한 필담에서 동학당은 먼저 순창에서 군대를 철수해 운봉으로 가서 재기를 꾀하려 하는 방침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는데, 천우협은 일시 당군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마도 동학당은 전주의 대전에서 참패했기 때문에 당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당시 전봉준의 휘하에 있는 병사는 3백 명 내외의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천우협도는 지용(智勇)의 사(士)라고는 하지만 불과 14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양자의 힘을 합치더라도 사람 수가 매우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에는 정예 무기가 없고 겨우 화승총을 가지고 있을 뿐으로 그것조차 중요한 탄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바로 활약을 기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전봉준은 동학당에게 인연이 깊은 운봉의 영지(靈地)로 물러나 다시 각지에 산재해 있는 동지를 규합해 군용(軍容)이 갖추어지는 것을 기다려 활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천우협은 연도의 상황을 탐색하면서 경성으로 향해 전봉준이 삼남 각지에 있는 수천 명의 동지와 정보를 모아 개별로 경성으로 잠입해 오기를 기다려 서로 호응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정한 방략은 대체로 음력 7월 초순을 기해 천우협은 동학당의 편에 경성 및 그 부근에 잠입하는 자와 연락을 취해 왕성으로 몰려가 첫 번째로 왕성의 문을 파괴하고, 이를 신호로 동학당은 “외국인이 우리 왕성으로 밀려왔다. 잠시라도 유예해서는 안 된다. 속히 이를 격퇴하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성문으로 몰려가 위병을 물리치고 입문한다면 천우협은 이들과 한 무리가 되어 위병을 격퇴하고, 동학당은 왕을 옹위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천우협은 그 고문이 되어 함께 천하를 호령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동학당의 목적은 오로지 정부를 타도하려는 데 있고 중국군을 몰아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뜻은 없었는데, 천우협도와 의견을 교환하면서 비로소 중국의 세력을 몰아낼 결심을 갖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정치적 의견은 이에 일보 전진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우협은 이러한 밀약이 성립하자 자진해 동학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하고 정식으로 입당식을 행해 당의 주문(呪文)과 기타 당원의 자격증명서라고도 할 만한 것을 수여했다. 그것만 있다면 도처에 산재하는 당원을 자유로이 불러모을 수 있다. 양자의 결별과 기념품 다음 날 아침 동학당군은 일찌감치 순창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천우협도는 이별을 알리기 위해 전봉준의 거실을 방문하였다. 전봉준은 매우 감격해서 그들과 악수를 나누고 어쩐지 이별을 애석해하는 모습이었다. 헤어질 때 스즈키 덴간은 소지하고 있던 마노(瑪瑙) 구슬을 주고 오사키 마사요시도 소지하고 있던 회중시계를 선물로 주었는데, 전봉준은 “기념품을 평생 잃어버리지 않겠다.”라며 매우 기뻐하며 재배(再拜)하고 이를 받았다. 그때 일시적 이별이라고 하며 헤어졌던 전봉준은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당한 당군(黨軍)의 철수와 협도의 전송 당군이 철수하는 날은 아침부터 뜨거운 햇빛이 타는 듯이 빛나 매우 더운 날이었는데 그들은 더운 날씨 아래 행렬을 지어 10여 기의 간부가 이를 지휘하고 전봉준도 역시 말을 타고 전 부대를 감독하며 보무(步武) 엄숙하게 행진을 시작했다. 천우협도는 이를 전송하며 감개하고 무량해하였다. 각설하고 편자는 여기에서 다소 동학당에 관한 일화를 서술해 그들이 세상 보통의 폭도라는 오해를 풀고, 아울러 조선 근대의 걸물인 전봉준이라는 사람의 면목을 회상하는 재료로 삼고 싶다. 당도의 군기와 전봉준의 일화 조선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당의 전부가 모두 규율이 엄정한 의도(義徒)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해도 전라 각 방면, 즉 전봉준의 지배 아래에 있던 동학당은 호령이 엄명(嚴明)하여 추호도 범하는 바가 없고 그 질서가 있음이 관군보다 훨씬 위에 있다. 이것은 전봉준이 특히 사람들에 대해 자랑하고 있는 바로, 당군이 한때 천하의 민망(民望)을 얻기에 이른 원인도 역시 실로 여기에 있었다. 관군이 도착하면 지방의 장노년은 모두 도망가고 그 가재(家財)는 약탈의 피해를 입고 닭과 돼지는 징발당해서 민중은 이를 호랑이와 같이 두려워했는데, 당군이 지나는 곳은 남녀 모두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나와 환영하고 하루라도 길게 머물 것을 애원하여 그치지 않았다. 농민은 진두(陣頭)에 와서 쌀과 보리를 끓이고 상인은 진중으로 들어와 잡화를 팔아 각기 모두 그 업(業)에 편안한 모습이었다. 또 당군이 그곳을 떠나려고 하면 수백 명의 농민과 상인 역시 그 뒤를 쫓아서 다른 읍으로 이전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것은 동학당과 함께 있으면 지방 폭리의 주구(誅求)를 면할 수 있고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협받을 우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동학당군은 실로 구세군이고 또 반도에서 순회적인 좋은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동학당군이 스스로 그 행정에 임하는 바를 칭하여 제중의소(濟衆義所)라고 한 것은 실로 명실상부한 것이었다. 나아가 동학당군의 군기가 엄정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족한 자료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순창에 주둔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시내에 무뢰한 무리 세 명이 공모하여 동학당의 이름을 이용해 지방의 부호를 위협하여 많은 금전과 곡식을 빼앗았다. 우연히 당원이 이 일을 듣고 전봉준에게 신고하자 전봉준은 포수를 파견해 그 무뢰한을 포박하게 하고 눈앞에서 그를 총살에 처한 다음 그 머리를 효수하고 그 옆에 “민재(民財)를 약탈한 자는 모두 이와 같다.”라는 표찰을 세워 지방 무뢰의 무리를 전율하고 숨죽이게 하였던 것이다. 또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지방관 가운데 준재(俊才)로 동학당이 봉기하자 경성으로 올라가 조정에 헌책한 당에 대한 정략의 요체는, 먼저 그 당인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이(利)를 통해 귀원(歸願)을 유도하고 이리하여 당군의 팔과 다리를 다 제거하고 그런 뒤 서서히 당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데에 있다. 이 방법을 따르면 난의 근원을 끊는 것이 용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헌책이 채용된 결과 전투에서는 관군이 자주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략상에서는 착착 실적을 올려 점차 당군을 남쪽으로 쫓아 몰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당군의 용사들은 이성렬을 매우 싫어하여 반드시 이성렬의 머리를 베고 그 삼족를 멸한다고 분개하고 있을 정도였다. 전봉준의 군대가 순창에 들어가게 되자 전봉준은 먼저 이성렬의 처첩과 아녀자의 소재를 확인해 바로 이를 내방(內房)에 봉쇄하고 수위병을 붙여 누구라도 그곳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하 용사가 자주 분개한다는 것을 들어 보더라도 결코 이성렬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봉준이라는 인물은 실로 이러한 점잖은 도량이 있는 남자였다. 당군 철수 뒤 협도의 여흥 천우협 동지는 당군이 철수한 뒤 그곳에 머물며 하루 휴양을 한 다음 새로운 목표 아래 행동을 개시했는데, 휴양 중인 우치다는 장기인 유도를 통해 무용(武勇)을 보인 통쾌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은 스즈키 덴간이 무료한 나머지 조선인 한 명을 희롱하다 반대로 부딪쳐 쓰러지려 했던 위험한 때 옆에 있던 우치다가 뛰쳐나가 항상 하던 조르기 기술로 질식시켜 조선인들의 기를 꺾은 사건이다. 이때도 우치다가 시간을 헤아려 급소를 만지자 해당 조선인은 눈을 뜨고 갑자기 달려 나가 5~6칸이나 가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망연히 박아 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일동이 벌컥 웃었다. 그런데 그 조선인도 껄껄 웃고 군중 속으로 모습을 숨겼기 때문에 또다시 벌컥 웃음이 터져 뜻밖의 희극에 무료함을 달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군중 가운데 비대한 몸집의 남자가 두 명 나타나 당차게도 우치다를 향해 힘을 겨루자고 신청했다. 우치다는 승낙하고 자세를 잡자 상대는 온몸의 힘을 넣어 뛰어 달려왔다. 그러자 우치다는 몸을 비키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1~2칸 정도 던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 나머지 한 명이 곧바로 날아오는 것을 붙잡아 어깨를 걸어 ‘에잇!’이라는 소리와 함께 던져 버렸더니 2칸 정도나 날아가 쓰러졌다. 이 대범한 기술에 두 명 모두 기세를 잃고 살금살금 군중 속으로 도망쳐 버린 것은 딱해 보였다. 이 무용을 보고 나서는 조선인이 우치다를 매우 두려워하여 우치다가 다가오면 목을 움츠리며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