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도 일행, 전주성에 들어가다 천우협 일행은 그다음 날 순창을 출발해 뜨거운 날씨에 도보여행을 계속하여 3일이 지나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全州)에 도착했다. 이곳을 목표로 나아간 것은 일본 동지에게 동학당의 상황을 전보하고 또 응원하는 동지의 조선 도항을 돕기 위해 경성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전주는 관찰사의 주재지로 동학당의 공격을 받은 이래 강화(江華)의 정예병 5백 명을 주재시켰다. 게다가 이들 병사는 신식 5연발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천우협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게 된다면 협도가 아무리 지용(智勇)이 풍부하더라도 14명의 작은 세력으로는 중과부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먼저 그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우치다, 도키자와, 요시쿠라의 세 명을 먼저 보내고 다른 자는 수십 분 늦게 전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전주 성문에 도달한 것은 마침 해가 지려는 시각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군아(郡衙) 이상의 관아에서는 해가 질 때 음악을 연주하면서 폐문식(閉門式)을 행하고 그런 뒤 성문을 닫는 것이 규칙이었다. 세 사람이 성문에 도착한 것은 이 폐문식이 바로 끝나려고 하는 때였기 때문에 서둘러 성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위하는 병사는 총검을 들고 이를 막았다. 굳세고 의지가 강한 우치다는 그 총검을 제치고 진입했는데 요시쿠라는 내지 여행 공문의 유무를 묻자 자신이 소지한 여권을 주며 이 한 장의 여권으로 다른 13명의 입문을 허가하라고 주장하며 크게 논쟁에 힘썼다. 위병은 허가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워 장관에게 상담하러 간 끝에 겨우 입문을 허가하였다. 이 담판 중에 뒤따라온 자도 성문에 도달했는데 요시쿠라의 담판에 응대하고 있던 위병의 상관인 듯한 남자가 장관에게 상담을 하러 갔다 오고부터는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졌다. 지금까지 입문을 저지하고 있던 위병들을 질타하고 일행을 인도하여 숙사에 데리고 가고 만찬 준비까지 알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눈에 띄게 태도를 바꾼 것은 오히려 섬뜩하게 생각될 정도였는데 호걸이 늘어선 일행으로서는 깊이 개의치 않고 숙소에 자리를 잡고 소주 등을 명하여 유유히 만찬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위병이 공손한 태도를 취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혼백과 간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도 포로의 전보와 야마자(山座) 영사관보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일본에 전보를 보내려고 하였는데 통신이 불통이라고 하며 접수를 거부했다. 일행이 전주에 들어온 목적은 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것인데, 다시 출발 준비를 갖추려고 하자 데리고 온 마부는 말과 함께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일행이 놀라 여러 곳을 수색하고 있는데, 부근의 시민은 그것을 보고 의미가 있는 듯이 조소(嘲笑)적인 태도를 보이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쩐지 전날과는 변화한 것을 느끼게 했다. 동지는 관찰사가 책략을 통해 일행을 궁지에 빠뜨리려 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 일부는 관찰사를 방문해 따지려고 하는 한편 다른 자는 성문 부근 상태의 정찰에 힘쓰고 혹은 폭탄을 준비하는 등 만일의 경우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 아마도 관찰사는 처음에 천우협도가 동학당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포박하려고 했던 것인데 용감무쌍한 협도와 정면충돌하면 어떠한 불행한 사태를 야기할지 모르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둘러싸 포박하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전날 밤에는 협도가 희망하는 대로 입성하도록 하고는 사방의 성문을 잠궈 먼저 이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든 다음, 마부를 위협하여 짐말과 함께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하고 이리하여 짐 운반의 자유를 빼앗고 협도가 진퇴에 궁해지는 것을 기다려 감옥에 가두든가 혹은 일본의 관헌에게 인도하는 절차를 취해 어쨌든 이곳에서 협도를 처분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사의 손으로 협도를 포박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경성의 일본공사관과 부산의 총영사관에 타전하여 “동학당 안에 있던 일본의 흉도 십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므로 속히 관리를 파견해 인수하라.”는 의미의 통지문을 보냈다. 공사관에서는 답장 전보를 보내지 않았는데, 부산영사관에서는 영사관보인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가 협도 일행이 부산을 출발한 이래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그 소식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보를 접하자 한편으로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조선 관리가 그들 일행을 붙잡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 사이에 무언가 사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바로 “잘 호송해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관은 파견할 수 없지만 군대를 파견할 것이다.”라는 답장 전보를 보냈다. 그러자 과연 다음 날에 이르러 관찰사로부터 다시 부산영사관 편으로 “14명의 일본인은 방약무인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여 성안을 탈출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라고 하는 전보가 도착했다. 야마자 등은 “관찰사의 이른바 포로라고 하는 것은 환영의 의미였을 것이다.”라며 크게 웃었다. 당시 경성에 있던 일본 유지는 공사관에 천우협이 포로가 되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는 것을 듣고 우려했는데 곧 탈출 소식을 듣고 안도했던 것이다. 협도의 격노 관찰사의 계락에 걸려든 협도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지경의 몸이 되어 빈번히 탈출 방책에 부심했는데 성문을 정찰한 결과 폭파를 통해 결사의 탈출을 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보였다. 더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탈출한다면 짐을 갖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손에 넣는 것이 급무였다. 한편 관찰사에게 따지러 간 일부 일행은 관찰 관아의 정문에 서서 안내를 청하였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불러도 두드려도 적막하여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분개하면서 돌아오고 있는데 우연히 앞쪽에서 대관(大官)과 같은 자가 여러 명의 종자(從者)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만났다. 그래서 다나카 지로가 달려 나가 그 앞 가운데에 서서 “그대들은 어째서 우리들이 데리고 온 말과 마부를 숨겼는가.”라고 소리 높여 따지자 그자는 놀란 모습으로 “그러한 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대관의 인질 다나카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른손으로 칼을 빼 들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가슴팍을 붙잡아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되지.”라며 눈을 부라리며 질책했다. 상대방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한마디 말도 뱉지 못하고 단지 와들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30명 정도의 병사가 뛰어와 협도 일단을 포위하고 총구를 겨누고 발사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오하라 요시타케가 화가 나 큰 칼을 빼어내 “너희들이 한 발이라도 쏜다면 이 대관의 목은 총성과 함께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목을 칠 것이니 각오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여 질책하였다. 옆에 있던 스즈키, 다케다, 시라미즈도 슬슬 칼을 뽑아 베어 버릴 자세를 취했다. 거기에 이어서 치바, 구사카, 오쿠보, 이노우에, 니시와키 등 5명이 칼을 뽑아 달려왔기 때문에 협도 측의 위세는 더욱 늘어났고 병사들은 사격 자세를 취한 상태로 헛되이 위협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다나카에게 가슴팍을 붙잡혀 떨고 있던 대관은 병사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제지하도록 명하고 다나카를 향해 “부디 이 손을 풀어 달라. 짐말과 마부가 없다면 반드시 인부(人夫)를 주선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문답하는 것은 매우 보기 좋지 않으므로 우리 관아로 오기를 바란다.”라고 탄원해 다나카가 풀어 주자 앞서서 관아로 안내했다. 관아에 도착하자 대관은 협도를 향해 “사실은 보시는 대로 여러 현사(賢士)가 데리고 온 말과 마부는 어젯밤 쫓아 버려 이곳을 떠나게 했다.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다른 짐말로 대신하려고 해도 다소간 동학당도와 전쟁한 이래 짐말이 부족하여 현재 이곳에는 한 마리의 짐말도 없는 상태이다. 인부를 통해 말을 대신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란다.”라며 비로소 본심을 말하며 깊이 사과했다. 협도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승낙하자 곧바로 하급 관리에게 명해 5~6명의 인부를 데려오게 했기 때문에 협도는 그들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인부에게 지게 하고 일동이 이를 경호하면서 출발했다. 그런데 남문 근처에 도달하자 백 명 정도의 병사가 엄중하게 문을 호위하며 일행의 통과를 거부했고 수십 명의 병사는 문안을 가로막아 서서 통로를 차단하여 거기에서 뜻밖에도 다툼이 일어났다. 전주성의 탈출 선두에 서 있던 요시쿠라가 칼을 뽑아 위협을 했기 때문에 병사가 놀라 휭하니 길을 연 곳을 뛰는 토끼와 같이 먼저 요시쿠라가 튀어나가고 이어서 우치다, 시라미즈, 오쿠보, 오하라, 오사키와 용사 각자가 나아가 일동은 마침내 성문을 나왔다. 이에 무사하게 전주성을 탈출할 수 있었다. 협도, 계룡산에 들어가다 그로부터 일행은 충청도 계룡산(雞籠山)의 큰 사찰인 신원사(新元寺)를 목표로 나아갔는데, 도중에 인부가 도망을 치거나 식품이 부족해 고생을 하며 며칠 동안 고생스러운 여행을 이어 가 마침내 신원사에 도착했다. 신원사는 계룡산 산속에 있는 거찰(巨刹)로 사면이 무성한 초목 숲에 둘러싸여 맑은 물이 주변을 돌고 일대를 긴 벽으로 구획했는데, 동문(洞門)이 높이 솟아 있고 동문을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이 끝나는 곳에 대웅전이 있다. 고색창연한 크고 작은 승방과 불당이 늘어서 있고 뒤편에는 험준한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전방에는 전원(田園)이 조금 펼쳐져 곳곳에 농가가 산재한 것을 조망할 수 있는 풍경이 뛰어난 장소이다. 일행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휴양하는 한편, 장래의 대책을 강구하고 또 경성의 형세를 정찰하는 한편, 일본 동지와의 연락을 취하고 아울러 소재하는 동학당을 소집할 예정으로 특히 이곳을 선택했다. 일행이 도착하여 잠시 체재를 청하자 절의 승려는 기분 좋게 승낙하고 친절히 맞아 주었다. 계룡산 농거(籠居)의 목적 많은 위험과 노고를 무릅쓰고 온 일행은 이 그윽하고 평온한 장소에 몸을 두고 아침에는 스님의 독경 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는 주변 청류(淸流)에 얼굴을 씻고 낮에는 숲속에서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밤에는 때때로 맹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는 모양으로 불과 하루 이틀의 휴식으로 완전히 피로를 회복했다. 다나카, 오사키 등 2대(隊) 앞뒤로 정찰을 위해 경성으로 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는 경성으로 잠행하여 형세를 알아보고 나중 계획에 도움이 되기 위해 먼저 다나카, 도키자와, 오하라 세 명이 제1대로 출발하였고, 이어서 사나흘이 지나 오사키, 요시쿠라, 시라미즈, 구사카, 오쿠보가 제2대로 잠행했다. 아마도 제2대는 정세가 절박한 때 잘못해 시기(時機)를 놓치지 않고 활동하기 위해 나중에 갔던 것이다. 다나카 등의 입경과 경성의 정세 다나카, 오하라, 도키자와의 제1대는 지름길을 선택해 급히 가 무사히 경성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미 인천에 상륙한 우리 혼성여단의 일부는 경성에 들어가 왕성 수호의 임무를 맡았고 중국공사 원세개를 비롯한 재류 중국인의 대부분은 경성을 떠났다. 다나카 등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경성 시가에 잠입해 형세를 관찰한 결과, 이미 동학당과 약속한 쾌거를 행할 필요도 없이 천우협도가 목적으로 삼아 분기(奮起)한 일청 개전도 드디어 눈앞에 임박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후의 행동은 신중하고 또 기민할 필요가 있으므로 앞날의 대책에 분주해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 관헌의 주목을 끌면서 경성에 머무는 것은 위험해졌기 때문에 협의를 한 결과, 육군 중위직에 있는 도키자와 우이치는 귀국하여 군적(軍籍)에 복귀하고 다나카, 오하라의 두 명은 계룡산 회의의 합의를 바탕으로 죽산성(竹山城) 안성읍의 김 모 집으로 가 그곳에서 동지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오사키 등의 성환(成歡) 통과와 중국군의 전비(戰備) 제2대로 계룡산을 출발한 일행은 공주에 도착하고 나서 상담한 결과 2개 조로 나뉘어 경성으로 급히 가기로 하여 오사키와 요시쿠라 두 명은 좌도(左道)를 취하고 구사카, 오쿠보, 시라미즈 세 명은 우도(右道)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오사키와 요시쿠라가 성환에 도착했을 때 시가에는 중국군이 들어와 있어서 군아(郡衙) 문전에는 황룡기(黃龍旗)를 비롯해 길고 작은 깃발이 바람에 날려 펄럭이고 있었고, 시가 양측의 가옥에는 중국군이 충만해 그곳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는데 다행히 검문을 받지 않고 시가를 통과해 빠져나갈 수 있어 마침내 교외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역시 밭이건 언덕이건 간에 다수의 중국군이 모여 있어 여러 곳에 보루를 쌓고 전투 준비에 급급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며 청군이 이렇게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는 점으로 살펴보니 일청 양국이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은 분명했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일본이 군대를 보내는 것이 늦어져 청군에 기선을 제압당하는 바가 없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찍 경성에 도착해 정세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로 말하면서 앞길을 서둘렀다. 두 명은 야행(夜行)을 하며 길을 서둘러 큰 뇌우(雷雨)를 만나기도 해 매우 어려웠고 도중에 하루 자고 칠원역(七原驛)에 도착했을 때에는 중국군 가운데 용감하다고 들은 만주의 백마대(白馬隊)가 그곳으로 들어와 시내가 백마로 채워져 있는 것을 바라보고 위험이 자신들에게 임박했다고 생각해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두 사람은 보병 두 명을 수행하고 조선인 통역을 데리고 가는 1기(騎)의 중국 병사와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불가사의한 중국군의 후의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그 중국 병사가 두 명에 대해 조금도 적의(敵意)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보호를 하려는 태도를 취했고 끊임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말을 걸고 칠원을 통과할 때는 그곳에 숙영하고 있는 중국군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는 두 사람에게 빨리 오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여 이 위험구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칠원역을 벗어난 곳에 멈춰서 “이곳부터 앞쪽에는 청군이 없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이곳에 있는다면 위험이 생길 것이므로 빨리 달려 이곳을 벗어나라.”라고 경고하고 헤어졌다. 오사키와 요시쿠라는 완전히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이 중국 병사가 두 명에게 이렇게나 호의를 보였는지 그저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천우협의 용사로서 이를 하늘의 도움으로 돌리고 하늘의 뜻과 하늘의 도움에 보답하도록 더욱 분발하자고 말하고 말았는데, 오사키와 요시쿠라는 훗날이 되어서도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각설하고 이때 두 명은 중국군의 친절한 경고에 따라 1리 정도나 달려갔을 무렵 너무나 서둘렀기 때문에 마침내 지쳐서 어느 나무 그늘의 작은 가게 근처에 도달했을 때 한 장의 돗자리가 그곳에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위에 쓰러져 잠시 동안 서로 말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뒤 두 명은 작은 가게에 수박이 있는 것을 사서 먹고 그것으로 조금 소생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윽고 다시 격한 피로를 느껴서 두 명 모두 그대로 그곳에서 어느 사이엔가 꾸벅꾸벅 꿈길로 빠져 들어갔다. 오사키, 요시쿠라의 깊은 잠과 일본 기병의 내진(來進) 그런데 갑자기 부근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조선인이 “군대가 왔다, 군대가 왔다.”라고 외치면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뜻밖에 잠결에 들렸다. 이 때문에 갑자기 놀라 몸을 일으켜 근처에 있던 두세 명의 조선인에게 “청군이 왔는가.”라고 물었더니 “아니, 일본군이 다수 왔다.”라고 대답했다. 일어나서 전방을 바라보니 틀림없는 일본의 기병이 당당하게 열을 이루어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사키와 요시쿠라는 놀라고 기뻐하며 길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병 한 부대가 따그닥따그닥 말발굽 소리도 용맹하게 면전으로 행진해 왔는데, 조선인이 군집해 있는 사이에 일본인 두 명이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확인한 장교 한 명이 수상한 기색을 띠면서 “그대들은 일본인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두 명의 대답을 들은 장교는 “왜 이러한 곳에 와 있는가. 또 어디로부터 왔느냐.”라고 따져 물으며 매우 의외라는 모습이었다. 두 명이 “우리들이 통과해 온 경로와 실제로 본 곳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으니 잠시 정지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말하자,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원에게 휴식 호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곧바로 말에서 내려 각기 적절한 장소를 선택해 휴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연도 중국군의 상황을 설명하다 장교가 조장(曹長) 한 명을 불러 함께 두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오사키와 요시쿠라는 교대로 보고 들었던 것을 말했다. 성환의 정세와 청군의 병력 수의 개략, 보루 축조의 상황, 안성천의 깊이, 아산 백석포(白石浦) 방면 도로와 그 거리, 칠원에서 백마대의 상황, 기타 두 명에게 매우 편의를 제공한 중국 병사의 행동까지도 자세하게 말했다. 장교는 말을 다 듣자 “두 사람의 보고를 받아 정말로 매우 기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말하는 것에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두 사람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중국 병사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모름지기 일본의 세력을 조선에서 일소하기 위해 출병한 중국 군인이 일본 복장을 한 일본인이 당당하게 통과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거나 도리어 이에 친절을 다하는 것 등은 상상할 수도 없다.”라고 말하여 이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를 풍겼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도리로서 추측하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어서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장교는 소리를 내 웃으면서 “자네들은 다소 조선의 사정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기이한 말을 하여 우리를 놀리는 것은 아닌가.”라며 더욱 업신여기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질의 두 사람은 발끈 화를 내며 “지금은 국가의 대사에 임해 우리들은 충군애국의 정이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때 거짓말을 지어내 군대를 속이려 하는 것은 우리들이 결코 할 수 없는 바이다. 우리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하 마음대로이다.”라고 말을 그만두고 다시 거적 위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교와 조장은 당황하며 제지하고, “우리는 결코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사실이 너무나 의외의 것이기 때문에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어 마침내 실례의 말을 사용한 바이다. 부디 화를 내지 말고 견문한 바를 들려주기 바란다.”라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화를 내는 두 명을 달래는 것이었다. 두 사람도 원래부터 우리 군에 참고가 되는 것은 충분히 말하겠다는 것이 본뜻이었기 때문에 장교의 질문에 응해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설명하고 그것을 조장이 필기로 기록해 일단 두 사람이 눈으로 틀림없음을 확인한 뒤 엄봉(嚴封)하여 전령에게 지참하게 해 여단본부에 말을 달리게 해 보냈다. 이리하여 우리 기병대는 그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말에게도 충분히 먹이를 준 다음 전투 준비를 갖추어 칠원을 향해 용감하게 행진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안성 도착과 다나카, 오하라 등의 선착 기병대와 헤어진 오사키와 요시쿠라 두 사람은 더욱 많은 괴로움을 맛 보면서 이삼 일 보행을 계속해 예정한 안성읍 김 모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때는 이미 구사카, 다나카, 오하라, 오쿠보 등 동지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고, 시라미즈는 계룡산에 잔류하는 스즈키, 우치다 등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 계룡산을 향해 출발한 뒤였다. 그리고 오사키, 요시쿠라가 우리 기병대와 헤어져 이곳에 도달하는 도중에 조우한 많은 진기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러한 일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안성읍의 김씨 천우협의 지사가 몸을 의탁한 안성읍의 김씨라는 자는 전에 일본주재공사였던 김가진(金嘉鎭)의 형제 집으로, 그때의 주인은 김가진의 조카에 해당하는 자였는데 양반에 속하는 역력한 가문으로 저택도 굉장했기 때문에 지사가 잠복하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장소였다. 마침 요시쿠라, 오사키가 도착한 날 이곳에 일본 기병 2기가 들어와 부근의 정세를 정찰하고 그대로 체재하였는데, 다다음 날에는 다시 보병 한 부대가 당당히 들어왔다. 지사 일동은 통로로 이들을 마중 나가 선두에서 나아가고 있는 사관 한 명에게 환영의 뜻을 말하고 또 “우리들 동지는 오랫동안 조선에 있는 자로 모두 다소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혹시 육군에서 필요가 있다면 꺼리지 말고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라고 제의했다. 오하라(小原) 대위를 맞이하다 그 사관은 중위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뒤쪽에 중대장이 오기 때문에 모든 일을 중대장과 상담하기 바란다.”라고 대답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이윽고 중대장이 살찐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일행은 이전과 마찬가지의 의지를 알리자 중대장은 기쁜 기색을 나타내고 “지금부터 1리 정도 전진하면 휴게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기 때문에 동행해 주기 바란다.”라고 희망했다. 이는 독립중대의 대장 오하라 분페이(小原文平)라는 보병 대위였다. 그래서 일동은 바로 군대와 함께 전진했는데 1리 정도 나아가자 좌우는 산으로 둘러싸이고 전방은 산세가 다가와 마치 문(門)과 같은 지세가 좋은 곳에 도달했다. 오하라 대위는 그곳에서 전원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다시금 일행에게 인사를 한 뒤 “이 부대는 성환으로부터 서북 2리 정도에 있는 직산의 뒤편으로 나와 칠원, 성환 방면으로부터 나가는 여단본부와 책응(策應)하여 적을 협격하기 위해 전진한 독립중대이다.”라고 하며 중대 간부와 함께 지도를 펼쳐서 일행을 향해 직산 방면에 관한 지리를 물었다. 다나카 지로의 명쾌한 지리 설명 일행 중 다나카 지로는 참모본부 부속의 전 육군 대위였을 뿐만 아니라 이 방면의 지리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일일이 명쾌한 설명을 해 주었고 제시한 지도의 오류까지 바로잡았기 때문에 대위 등은 새삼스레 놀라고 또 기뻐하며 곧바로 세 명의 기병을 불러 직산 방면으로 정찰을 가게 하였다. 척후가 출발한 뒤 오하라 대위는 일행을 향해 “2~3일 전 성환, 칠원, 진위 방면의 적 상황과 아산, 성환, 직산 사이의 지리 거리, 그 사이에 있는 하천의 깊이와 넓이 등을 상세히 정찰하여 여단본부에 보고한 자가 있다. 이 대담한 보고자는 민간인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제군들이 알고 있는 자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다나카는 웃으면서 오사키와 요시쿠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이 두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오하라 대위 등 오사키, 요시쿠라의 대담함에 놀라다 그러자 대위를 비롯해 장교들은 매우 놀라며 “귀하들은 어떠한 대담한 사람인가. 그러나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저 정도로 위험한 곳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것 중의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확실히 하늘의 도움이다. 이 하늘의 도움이 있는 두 호걸이 와서 우리 중대와 행동을 함께하게 된 것은 정말로 다행이고 우리 독립중대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중대 전원을 향해 두 사람의 일을 알리고 “우리 부대에는 이미 하늘의 도움이 있다. 대원은 분투 매진해 맹서하여 일본 군대의 이름을 더렵히지 말라.”라고 격려하고 모든 병사는 일제히 만세를 외쳐 더 한층 사기가 올라갔다. 척후 기병, 총 세례를 받고 돌아오다 이윽고 대위는 여행 짐 속에서 두 병의 포도주를 꺼내 “제군의 노고를 축하하기 위해 보관해 둔 이것을 쓰기로 한다.”라고 하며 먼저 오사키와 요시쿠라에게 권했다. 이어서 동지 면면이 이를 나누어 마시며 잠시 담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앞서 파견한 척후 기병 가운데 두 기(騎)만이 돌아와 직산에 접근해 사방을 주의하면서 전진하던 중 돌연히 적군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총 세례를 받아 그 때문에 전진을 중지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적이 왕성하게 추격하여 비 오는 것같이 탄환을 집중해 인마(人馬) 모두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귀환할 수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른 1기(騎)는 퇴각하던 중 헤어져 불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위는 “너희들의 임무는 정찰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첫 번째 요무(要務)이다. 전우의 생사는 너희들이 인정이 없기 때문이 아니므로 신경 쓰지 말고 더욱 분투할 각오가 중요하다. 아군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매우 수고 많았다.”라고 부드럽게 격려하는 모습은 그 인격을 생각하게 해 지사들에게도 호감이 가게 느껴졌다. 과연 대위가 말한 대로 다른 기병도 조금 늦게 돌아와 선착한 척후와 대동소이한 보고를 가져왔다. 저녁식사 후 여러 곳에 보초를 배치하고 때때로 척후를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면서 산 위 서너 곳에는 왕성하게 횃불을 피워 위세를 보이고, 밤이 깊은 12시를 기해 전진을 개시한다는 내용을 예고하고 전 부대는 잠깐 동안 노영(露營)의 꿈을 꾸었다. 천우협의 지사들도 역시 군대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노영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하라 중대의 직산 진격과 협도의 종군 전진 명령이 내려질 무렵에는 가는비가 축축히 내리기 시작해 사방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중대가 찾아가는 길은 직산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도로라는 것은 이름뿐인 좁고 험한 길이어서 야음을 틈탄 행진은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어 밭 속으로 헤매 들어가거나 도랑에 발이 빠지는 것 등도 여러 번 있었다.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굴하지 않고 굽히지 않고 강행군을 계속해 약 3리 정도 나아갔을 무렵 성환 방면에 이르러 포성이 울리고 맹렬히 소총을 발사하는 소리도 역시 희미하게 들렸다. 성환 방면의 포성 때는 바로 3시경으로 생각된다. 이 포성과 총성은 큰길로 전진한 본대가 드디어 적을 향해 전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세가 이와 같은 이상 중대는 새벽에 직산 뒤편에 도착하지 않으면 불리하므로 더욱 발길을 서둘렀던 것인데, 비는 그치지 않고 더욱 어두워져 마음만 조급해지고 길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직산(稷山)의 전투 드디어 밤이 지나 날이 밝을 무렵 직산의 배후 산기슭에 도착하자 산 위에는 청군의 크고 작은 깃발이 몇 개인지도 모르게 바람에 펄럭이고, 부근에는 장막이 펼쳐져 크게 진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그들은 우리 독립중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산 위에서 맹렬히 총알을 퍼부었는데, 우리는 버드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는 둑과 수목이 무성한 전면의 약간 높은 언덕을 이용해 두 개로 나뉘어 전개한 다음 비로소 사격을 하며 응전했다. 피아가 맹렬히 총탄을 교환하는 것도 잠시, 마침내 적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윽고 진용이 흩어져 퇴각을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우리 군은 곧바로 노도와 같이 산 위를 향해 돌격으로 이행했다. 적군의 패주 우리 군이 산 위에 돌진했을 때 적은 길고 작은 깃발을 버려둔 채로 도주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산기슭 저편에서 거미줄을 흩어 놓듯이 열이 흩어져 퇴각하는 것이 보였다. 큰길로부터 전진해 오는 본대의 함성은 바로 앞에서처럼 들리고 은은한 포성은 지축을 부숴 버릴 정도로 울려 퍼져 이미 적을 물리치고 추격으로 옮긴 것으로 보였다. 중대는 곧바로 적을 추격하기 위해 산을 달려 내려와 겹겹이 쓰러져 있는 적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면서 숨도 쉬지 않고 전진 또 전진해 아산 방면을 목표로 서둘러 갔다. 그때 하늘이 갑자기 흐려져 천지가 암담해진 사이에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울려 무시무시한 대뢰우(大雷雨)가 되어 지면은 순식간에 도도한 탁류로 변해 가 언제 멈출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치수(治水)의 설비가 없는 조선의 명물인 호우에 의한 탁류는 도로도 논밭도 모두 떠내려가 버릴 정도로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대는 전진의 방해를 받은 것이 심했다. 지사의 면면도 젖은 쥐처럼 되어 언제인지 모르게 흩어져 버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 그 같은 호우도 그치고 마침내 밝아졌는데 병사들의 피로는 심했기 때문에 해가 짐과 동시에 전진을 중지했다. 그날 밤은 적당한 부락을 선택해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적의 흔적을 따라 아산으로 향했는데 한 명의 적도 만나지 못하고 오후 2시경 아산에 도착했다. 협도들, 계룡산에 잔류자의 안부를 걱정하다 전진 중에 흩어지게 되었던 천우협의 동지는 이곳에서 다시 만났는데 오하라는 직산의 전투 뒤 발병하여 도중에 오쿠보의 간호를 받으면서 안성으로 돌아왔다. 아산에 도착하고 나서 동지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계룡산에 잔류하고 있는 스즈키, 우치다 등의 신상이었다. 아산에서 패한 청군은 어떻든 공주 가도를 통해 퇴각하고 강원도로부터 평양으로 들어가 재거(再擧)를 꾀할 것으로 추측되었기 때문에 마중하러 간 시라미즈와 함께 스즈키, 우치다, 다케다 등이 계룡산에서 철수하여 온다면 때마침 공주 부근에서 패주 중인 청군과 조우하게 된다. 만약 불행하게도 그들이 청군과 조우한다면 중과부적으로 비참한 운명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이를 구할 방도가 없는지 일동은 우려하는 기색을 보이며 여러 가지 평의를 했지만 마침내 아무런 묘책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는 빨리 안성으로 돌아가 가능한 한 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하고 아산에서 하루 자고 다시 안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요시쿠라만은 신문기자 자격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군용선에 편승하여 인천으로 가서 본국 및 인천, 경성 방면의 형세를 관찰하겠다고 말하고 홀로 백석포(白石浦)로 향했다. 혼마 규스케의 계룡산 추적 각설하고 계룡산의 신원사에 머물고 있던 스즈키, 우치다, 다케다, 치바, 이노우에, 니시와키 6명에게 그 뒤 혼마 규스케가 달려갔다. 혼마는 일행이 부산을 출발할 무렵 경성에서 그 계획을 알고 이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에 급히 갔었지만 그때는 이미 일행이 출발한 뒤였기 때문에 단신으로 그 뒤를 쫓아 여러 곳을 찾아 돌아 마침내 계룡산까지 더듬어 도착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곳에서 스즈키 등으로부터 전봉준과의 맹약에 따라 동지 8명이 경성 방면으로 출발했다는 말을 듣자 체제한 지 불과 하루 뒤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 장점인 튼튼한 다리를 이용해 다시 그 뒤를 쫓아 출발한 것이다. 그 뒤 잔류한 6명은 선발대로부터 정보를 기다리는 동안 산 위의 절을 떠나 산기슭의 절로 옮겨 심심한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비도 이미 거의 다 썼기 때문에 일동은 평의를 한 끝에, 이전부터 산 위의 절에 있었을 때 스님이 스즈키 덴간이 소유한 훌륭한 단도를 자주 갖고 싶어 했으므로 그것을 팔아 치워 여비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스즈키 덴간의 역점(易占) 다음 날은 다시 산을 올라가기로 하고 덴간이 장기인 역(易)을 통해 점을 친 결과 그날은 ‘대흉(大凶)’이라는 점괘가 나왔기 때문에 다시 하루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치다는 그 대흉이라는 날인 것도 개의치 않고 신원사로부터 1리 정도 떨어진 경천(敬天)이라는 촌락에 시장이 선다고 듣고 니시와키, 이노우에 두 명을 데리고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고 표연히 외출했다. 경천에서는 이전부터 동학당에 가세한 일본인이 다수 계룡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면 때려죽이자며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우치다가 시장에 가서 두세 가지 물건을 사고 마지막으로 계란을 사려고 하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이 함성을 지르며 닥쳐왔다. 우치다, 경천(敬天)시장의 위난 우치다가 눈치를 채고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여러 명의 조선인이 이노우에를 붙잡아 난타하였다. 우치다는 그것을 보고 즉각 달려가 이노우에를 붙잡고 있는 조선인에게 날아가 옷깃을 조르고 쓰러뜨렸다. 이노우에는 그것을 기회로 재빨리 몸을 숨겼는데 다수의 조선인은 우치다 한 명을 노리고 덮쳤다. 우치다는 장기인 유도로 두세 명을 상대해 쓰러뜨리고 원래 왔던 뒤편 광장으로 도망쳐 보니 멀리 상대편에 니시와키가 도주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아 생사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그를 발견해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떼를 지어 덤비는 적과 난투를 계속하는 사이 적이 갖고 있던 곤봉을 빼앗아 그것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싸웠는데 운좋게도 상대방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빈번히 사방을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이노우에, 이노우에”라고 연호했다. 그러자 이노우에가 오이밭 가운데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피범벅이 되어 나타났다. 우치다는 기뻐하며 “이노우에 빨리 내 뒤에 붙어라. 달라붙어서 결코 떨어지지 마라.”라고 명하고 이노우에를 배후에서 감싸면서 귀로를 막고 있는 군중 속을 돌진하여 힘닿는 한 분격했다. 이 귀신과 같은 행동에 많은 세력을 자랑하는 적도 난처해하며 휭하니 길을 열어 주어 그 틈을 타 뛰는 토끼와 같이 달려서 빠져나갔다. 이번은 스스로 후미가 되어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물러났는데 적의 추격은 다시 급해져 위험할 뿐만 아니라 특히 전에 병에 걸려서 아직 충분히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우치다는 앞선 시간부터의 분투에 눈에 띄게 피로가 찾아와 이대로 달려서 물러난다면 마침내 두 명 모두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치다는 스스로 참고 버티며 싸우는 사이에 적어도 이노우에만큼은 탈출시키려고 결심하고 이노우에를 향해 “너는 뒤를 보지 말고 열심히 달려서 돌아가 산에 있는 동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급히 알려라. 내 일은 걱정하지 말고 빨리 달려가라.”라고 말을 뱉었다. 발길을 되돌려 다시 따라오는 적에 맞서 먼저 선두에 서 있는 조선인의 정수리를 노리고 때린 다음 이어서 오는 한 명도 마찬가지로 혼절시켰다. 나아가 세 번째 남자에게 날아가 머리에 일격을 가했으나 그는 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격으로는 쓰러지지 않고 도리어 우치다에게 달라붙었다. 우치다는 굴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던져 버렸지만 그때는 이미 정력을 다 소진해 피로가 극에 달했다. 폭도는 순식간에 사방에서 둘러싸고 비와 같이 돌을 던져 그에게는 두려운 운명이 일순간 밀려왔다. 그때 날아온 큰 돌이 우치다의 얼굴에 명중하여 모두 인정할 만한 용자(勇者)도 그곳에 그대로 혼절하여 마침내 적에게 붙잡혀 버렸다. 포학한 그들은 아직 질리지 않고 우치다의 어깨 부분을 물어뜯어 살을 먹고 혹은 난타를 가하는 등 일체의 만행을 저지르면서 마을 입구까지 끌고 가 바로 참살하려고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시끄러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우치다의 생명을 30관문(貫文)에 사다 그때 종자 승려를 데리고 지나가던 한 승려가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다가와 욕설을 퍼붓는 군중을 제지하면서 인명을 빼앗는 죄악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생명을 구할 것을 권했다. “이자의 생명을 구해 준다면 내가 상금으로 금 30관문을 주겠다.”라고 말하자 지금까지 살기등등하게 소란을 피우고 있던 폭민들은 갑자기 조용해져 “30관문을 준다면 여기에서 석방해도 좋다.”라고 승낙했다. 승려는 곧바로 종자 승려에게 명하여 우치다의 포박을 풀게 하고 폭민들에게 더 이상의 난폭을 하지 않도록 굳게 타이르고 우치다에게 빨리 그곳을 떠나도록 독촉했다. 바로 소설에 있을 법한 한 장면으로 우치다는 생각지도 못한 승려의 출현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우협도는 여러 가지 기적적인 사건과 조우했는데 이 우치다의 경우 등은 가장 불가사의한 하늘의 도움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한 동지들, 우치다를 도와 돌아오다 겨우 일어선 우치다는 꿈에서 꿈을 꾸는 마음으로 주종(主從)의 승려에게 인사를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올랐는데 이것을 둘러보고 있던 군중은 굳이 이를 막으려고 하지 않고 걸어가는 우치다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우치다는 몹시 괴롭고 피곤한 몸을 스스로 추스르면서 마침내 십수 정(町) 정도를 걸어왔을 때 이노우에의 알림을 받고 구원을 위해 달려온 동지의 모습을 확인했다. 동지들도 우치다가 위험한 곳에서 벗어난 것을 알자 달려가 입을 모아 “아아! 살아 있었구나.”라고 기뻐하면서 “실은 귀공(貴公)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각오하고 우리들은 복수를 위해 촌락을 전멸시켜 버리려고 생각해 폭파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걸려 늦어졌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라며 상처 등을 살펴보면서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다케다 한시가 갑자기 그곳에서 졸도해 버렸다. 그는 우치다의 신변을 생각하느라 병후의 몸인 것을 잊고 뜨거운 날씨에 질주해 왔던 것인데 우치다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자 갑자기 맥이 풀려 졸도한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라 동지들은 거듭 다케다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는데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치바 규노스케는 부근을 물색해 조선인 한 명을 붙잡아 와서 그에게 다케다를 업게 하고 스즈키 덴간이 우치다의 손을 끌면서 겨우 신원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촌민이 대거 내습한다는 소식과 폭탄 그날 밤 촌민이 대거 내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협도 무리는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다렸다. 절은 한 명이 지키면 만 명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험한 곳이기 때문에 폭민이 몰려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온다면 혼내 주겠다고 각자 담당 장소를 정해 분발하였다. 우치다도 온몸의 상처를 치료해 점차 원기를 회복하였다. 낮에는 몸에 작은 쇠[寸鐵, 무기를 말함]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뜻밖의 경우를 당했지만 오늘 밤이야말로 복수의 기회를 하늘이 준 것이라며 감연히 제일선의 임무를 맡았다. 절의 승려는 협도가 적을 기다리면서 무언가 함(函)에 넣은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기고 “그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즈키 덴간이 폭탄이라고 설명해 주자 한번 시험 삼아 보여 달라고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아 때를 잡아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여러 개로 묶어 계곡 밑에 던졌는데 굉장한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여 배후에 솟아 있는 산악에 반향을 일으켜 멀리 경천 방면에까지 울려 퍼졌다. 절의 승려가 놀란 것은 물론이지만 다음 날이 되어 들어 보니, 이때 경천의 폭민들이 협도를 습격하겠다며 도중까지 밀려왔는데 때마침 이 큰 소리를 듣고 몹시 놀라 일본인은 단 한 사람으로도 우리 다수를 살상시킬 수 있는 정도인데 게다가 대포까지 갖고 있다면 도저히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퇴각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날 밤 협도는 빈번히 적의 내습을 기다렸는데 밀려오는 모습도 없고 그 사이 우치다는 부상한 몸에 피로가 더해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몸이 아파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적이 습격해 올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절치통탄(切齒痛歎)하였다. 그러나 절 승려의 보고에 의해 경천 폭민이 내습을 단념했다는 것이 밝혀져 그 이후 오로지 정양에 힘써 일주일 정도 뒤에는 마당을 산책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했다. 다케다도 역시 그 무렵에는 거의 정상의 몸으로 회복하고 지루한 때에 장기인 시작(詩作) 등을 시도하였다. 다음 태평가는 당시 다케다가 시장을 펼쳐 단숨에 지은 장시(長詩)이다. 태평가(太平歌) 태평가를 500년간 불러 왔으나, 장작을 쌓아 놓고 밑에 불을 넣어 앉아서 잠을 탐하네. 역수(曆數)에 조짐이 있어 정도령을 생각하나, 팔도에는 거꾸로 매달린 상황을 풀어 줄 사람이 없네. 삼남에서 때때로 두견새 우는 소리가 들리고, 태산이 조각구름 불러오려 하는데 한밤중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누군가는 손에 침을 뱉고, 어떤 사람은 베개를 어루만지며 개탄하네. 동학 교주 최제우가 세상을 건질 마음을 먹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니 명성이 한 시대에 높아지자 함부로 행동하기를 경계하고, 10만의 교도들을 한 어깨에 짊어졌네. 민중이 시사에 격분하는 걸 참지 못해, 우격(羽檄)을 날리자 인마 소리가 요란해지니, (그는) 염주를 손에 쥐고 총을 들고 일어나, 대궐 문을 밀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송사하려고 맹세했네. 전주에서 북쪽을 가리키며 천자를 배알하고, 남쪽의 영남과 호남의 형세는 이을 만하네. 전략으로는 오직 전봉준을 높이 추대하고, 수많은 군마가 하무를 입에 물리면서 겹겹의 산을 넘는데, 밤 연회의 술이 덜 깬 새벽안개 속에 온 성이 허겁지겁 울리는 활시위 소리에 놀라네. 군령이 12개 깃발에 명확하니, 성 아래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네. 조괄(趙括)이 투항을 받아 달라 요청하듯이 관군들이 번번이 패전하였으나, (동학군) 진영에서는 법연을 열어 강론하네. 삼남은 이미 관료들의 것이 아니니, 서울로 말안장을 조르는 것이 좋을 게다. 불길이 사방에 번지고 천둥은 터지니, 강화도의 친위군이 세찬 물결을 휘감네. 백성을 위해 백성을 죽이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온 도성의 백성들을 보전하고 퇴군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일본의 남아는 의로운 담력이 있으니, 하늘이 협객들을 도와주고 천자는 권력을 하사하시네. 벽력술(霹靂術)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비밀히 얻고, 긴 소매에 교규권(蛟虬拳)을 잘 감추네. 비 오는 어두운 밤에 가락국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달이 뜨기 전에 광한루(廣寒樓)에서 피를 마시네. 하늘과 땅을 뒤집는 일이 손가락을 튀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테니, 천백 명은 어린 15인으로 대적하도다. 하늘이 도와줌에 감응한 하늘의 협객들이, 일본에서 멀리 연기 싸인 계림을 바라본다. 하늘의 협객들이 서로 뜻을 합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니, 순창의 장청에서 천생의 연분을 맺는다. 8명의 장수들이 늘어서 있어 마치 빛나는 천둥과 같고, 빈객들이 예의를 갖춰 단상으로 올라가 마치 신선과 같도다.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며 밝은 태양을 향해 맹세하니, 도를 논하고 전략을 논함에 단상에서 바람이 인다. 대도라면 큰 반역을 행해도 괴상하지 않고, 비밀한 계획도 본체로 보면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네. 고을을 순행하면서 형세를 벌이다가, 갑작스레 기이한 계책을 놓고 서울 향한 길로 들어서네. 그대가 운봉(雲峯)에 도착하면 그대 말을 세우고서, 선계에서 내려온 듯 온 고을에 격문을 전하게. 계룡산에 있는 나는 내 방문을 닫고, 7월 초에 어지러운 낙천을 향해 채찍질해 가리라. 기이함 중에 기이함이 있어 기이함에서 기이함이 생기며, 언약 속에 언약이 있어 언약이 더 견고하도다. 가는 듯 오는 듯 숨기고 드러내기도 하면, 신묘한 변화를 누가 감히 그 실마리를 추측할 수 있겠는가? 천우협이여, 동학당아, 구천(九天)을 움직이고 구천(九泉)에 잠기리라. 원컨대 전에 없었던 위대한 공을 함께 세워서 대조선의 태평가를 길이 노래하세! 요운(妖雲)이 자주 날리다 어느 날 밤 달이 밝을 때 일동이 잠을 자면서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의 비운(飛雲)이 북쪽으로부터 나타나 범상치 않은 색을 띠며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우치다가 “스즈키 군! 저 구름을 보라. 매우 기괴한 구름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라고 하자 스즈키는 “과연 불가사의한 구름이네. 이것은 재미있는 구름이므로 밤에는 할 수 없지만 내일 아침 내가 점을 쳐 보겠다.”라고 말하고 잠에 들었다. 원래 스즈키는 즉각적이고 예민한 성격으로 신비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동전을 던져 겉면과 뒷면이 되는 것을 보아 점을 쳤는데 그 역단(易斷)은 실로 백발백중의 신묘함을 갖고 있었다. 스즈키는 또 니치렌슈(日蓮宗)의 신자이었기 때문에 신원사에 온 다음부터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스님과 함께 독경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따라서 절 승려의 신용이 두텁고 매우 인기가 좋았다. 스즈키의 역점(易占), 일청 개전을 알리다 다음 날 아침 스즈키는 여느 때처럼 본당에서 독경을 마치고 바로 방으로 돌아와 역(易)을 펼치고 가만히 정신을 모아 그 표를 보고 있었는데 잠시 뒤 입을 열어 “드디어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개전한 것 같다. 첫 번째로 불이 보인다. 불이 일어나 투쟁이 나타났다. 그리고 경성 가운데 화재가 났다. 그것은 전투가 벌어진 것인가, 아니면 낭인이 방화한 것인가 어떤지 모르지만 불이 보이고 그 뒤에 전쟁이 일어났다. 드디어 일청 개전이 되었군.”이라고 말했다. 시라미즈의 도착과 일청 양군의 형세 보고 그로부터 이틀째에 시라미즈 겐키치가 도착해 안성에 있는 동지의 생각을 전하고 “오늘쯤은 이미 일청 양군이 충돌했을 것이다. 내가 수원을 출발할 때에는 우리 군이 이미 그곳까지 와 있었다. 동지들도 모두 안성으로 집합해 제형(諸兄)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기로 하자.”라고 말했다. 시라미즈는 중국군이 직산으로부터 성환 부근에 진을 펼치고 있는 정중앙을 순조롭게 통과해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동은 이것을 듣고 용기가 남과 동시에 스즈키의 역이 적중한 것에 다시금 감탄했다. 우치다 등 일행의 출발 우치다의 쇠약은 아직 심했는데 공주까지는 불과 4리 정도였기 때문에 천천히 가더라도 하루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했고 공주부터는 말을 타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시라미즈가 도착한 다음 날 일동은 신원사를 출발해 공주로 향했다. 그런데 우치다의 체력은 아직 좀처럼 보행을 견딜 수 없어 공주로부터 1리 정도 앞에서 마침내 숙소를 잡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동틀 무렵 문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웠는데, 조선인이 연이어 도망쳐 오는 것을 확인하고 이상하여 이유를 묻자 “대국군(청군을 가리킴)이 다수 공주로 들어와서 약탈과 살육을 행하므로 도망쳐 왔다.”라고 대답하며 모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청군의 공주 내습과 위기일발 “병력 수는 어느 정도인가.”라고 물어도 단지 “다수이다.”라고 답할 뿐 요령을 얻지 못했는데, 협도 일행이 전날 밤 이곳에 묵은 것은 다행이다. 만일 공주까지 도착해 있었다면 청군의 살육을 보게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우치다가 경천에서 위험한 화를 당한 것은 지금이 되어 보면 도리어 일행의 위난을 피한 원인이 되었다. 우치다가 걷지 못했기 때문에 위난의 구덩이인 공주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도 또한 하늘의 도움으로 인간 운명의 기묘함에 일행은 다시금 감탄했다. 그러나 목전에 아직 위난이 놓여 있어 이것에 대처하는 방법은 어떠한가. 일행은 또다시 이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적정(敵情) 연구와 치바의 명찰(明察) 스즈키 덴간은 먼저 입을 열어 “첫 번째 연구해야 할 것은 청군이 공주로 들어왔다는 것은 양군 교전의 결과 우리 군이 패하고 청군이 승리해 부산으로 향하려고 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패전하여 도망쳐 온 것인가.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도단 출신이며 특무조장의 경력을 가진 치바 규노스케가 과연 훌륭한 의견을 말했다. “아니, 일본군은 지지 않았다. 만일 중국군이 승리해 이 방면으로 진군해 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곳까지는 기병 척후가 올 것은 아니고 보병 척후가 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무런 척후도 오지 않은 것 아닌가. 척후를 먼저 보내지 않고 대군이 단독으로 움직일 리가 없다. 또 만약 우리 군이 졌다고 한다면 반드시 고인(高仁) 방면으로 퇴각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중국군은 반드시 그것을 추격하여 그 방면으로 향할 것이므로 이 방면으로 올 이유가 없다. 내가 공주 방면을 보니 적은 금강의 도선장에 보초를 세우고 있을 뿐이고 다른 성 밖에는 병사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방면에 척후가 오지 않는 점에서 살펴보면 이것은 적이 이미 통제가 흐트러진 증거이다. 아무래도 중국군이 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치바는 이러한 의견을 말하고 “우리는 단연코 용감히 직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스즈키는 이 의견을 듣고 곧바로 찬성했다. 다케다도 역시 이에 찬성했다. 스즈키 등의 필담, 중국 패잔병을 도망가게 하다 결연히 전진하기로 정한 일행은 샛길을 선택해 금강 기슭으로 나갔지만 경성 방면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부터 도선장에서 배를 빌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곳까지 인부에게 짐을 지게 해 가져온 짐은 대부분 인부에게 주고 중요한 물건만 각자 휴대하고 몸을 가볍게 해 헤엄쳐 건너기로 하였다. 먼저 니시와키 에이스케가 시험 삼아 헤엄쳐 대안에 도달했고, 이어서 동지들이 헤엄쳐 건너려고 했는데 상류 쪽에서 조선인이 도보로 건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샛길을 더듬어 가기를 3~4리 정도에서 경성 방면으로 통하는 본도로 나왔는데 매우 돌아서 온 것으로, 그곳은 아직 공주에서 1~2리 떨어진 곳에 지나지 않아 뒤돌아보니 공주성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는 또 중국 패잔병을 만날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개의치 않고 본도를 잠시 나아가 어느 인가에 들어가 쉬고 있는데, 과연 두세 명의 중국군 부대가 전면에서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일동은 뜻밖에 주저하는 기색을 띠었는데 우치다는 “우리들이 도망간다면 그들은 승기를 타서 사격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우리들이 걱정하지 말고 돌진하는 것이 좋다.”라고 주장했다. 스즈키도 역시 이에 찬성하여 모두 죽을 각오를 정하고 당당하게 전진해 나가자 중국군은 일본인이 오는 것을 보자 곧바로 깃대를 땅에 떨어뜨리고 발걸음을 멈추고 정렬하여 조금도 싸울 뜻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였다. 그 모습으로부터 보아 확실히 패잔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즈키, 다케다 두 명이 나아가 대장과 필담을 시도했다. “우리 일본군은 이 부근에 다수 있지만 너희들 패잔병은 이미 전투력이 없는 것으로 인정하여 도망치게 해 줄 것이므로 속히 사라져라.”라고 써서 보여 주었더니 그들은 “감사! 감사!”라고 반복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치바의 관찰대로 아군이 이긴 것은 이를 통해 더욱 확실해져 일동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우리도 위험한 곳을 벗어났지만 저들도 위험한 곳을 벗어난 심정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로부터 잠시 나아가자 또 한 부대의 중국군과 만났는데 전과 같은 방법으로 넘겼을 뿐만 아니라 그때는 패잔병으로부터 한 마리의 말을 빼앗아 매우 피로해하고 있던 우치다를 말에 태워 보행의 고통을 없앴다. 전진함에 따라 중국 패잔병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두려워 도망을 치거나 또는 항복의 태도를 보일 뿐이었기 때문에 패잔병에 관한 불안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행의 기아와 중국군 행패의 흔적 단지 일행을 괴롭힌 것은 식료를 구하는 것이 곤란했던 점으로 연도의 촌민은 모두 도주해 버려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밭의 작물은 중국군이 이미 모두 파헤쳐 기아를 달래기에 충분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간신히 한 번 옥수수가 아직 익지 않은 것을 발견해 그것을 씹어서 한때의 배고픔을 달랠 뿐이었다. 일행은 이와 같이 간난(艱難)의 여행을 계속한 뒤 겨우 안성에 도착해 선발대 동지와 만날 수 있었다. 안성 도착과 축배 동지들은 서로 무사를 기뻐하고 축배를 들면서 각자가 경험한 바를 말하며 담소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오랫동안의 숙원인 중국 세력을 조선에서 축출하려는 목적은 일청의 개전에 의해 이미 달성되어 동아 통일의 대업을 향해 조금 관여했던 것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조선의 개혁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그것은 전쟁의 진전과 동반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경성으로 들어가 내외의 형세를 관찰해 장래의 방침을 정해야 할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안성의 김씨 저택에서 하루 잔 뒤 혼마 규스케만 뒷정리 때문에 머물게 하고 경성으로 향했다. 천우협 일행의 목적 달성과 형세 관망의 필요 그러나 이전에 다나카, 오하라 두 사람이 경성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 관헌의 주의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일동이 지금 함께 모여 경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 일단 경성 성 밖의 한강 세분고의 도선장 위쪽에 있는 민가(閔家)의 별장에 들어가 숙박하고 심부름꾼을 보내 경성에 있는 쓰쿠다 노부오(佃信夫)에게 도착을 알렸다. 쓰쿠다 노부오의 내방과 내외 정세 설명 쓰쿠다는 곧바로 그곳으로 내방하여 일동의 무사함을 축하하고 천우협도가 조선 내지로 진입한 이후의 정계의 형세, 일청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경과 등을 설명하고 또 천우협의 행동은 국민의 피를 끓게 해 정부로 하여금 정청(征淸)의 큰 결심을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깊이 그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했다. 그리고 쓰쿠다는 정부는 협도의 공로가 큰 점을 잊고 도리어 협도를 검거하기 위해 검색이 매우 엄중한 상태이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의하도록 했다. 아아! 애국의 지극한 정으로 달려 만 번 죽을 지경까지 분투해 온 지사가 지금은 도리어 국가의 죄인으로 대우받으려 한다. 정말로 매우 무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협도의 경성 진입과 수배자 그런데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협도들은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따로따로 관헌의 눈을 피하면서 경성으로 들어갔다. 경성에서는 여러 곳에 나누어 숙박하고 서로 연락을 취해 결속을 가짐과 함께 다른 유지들과도 은밀히 왕래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관헌으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였다. 제2의 천우협 계획 천우협이 조선으로 건너갔을 무렵 도야마 미쓰루와 히라오카 고타로 등은 개전이 늦어질 경우 다시 후발대를 내보낼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 계획에는 아라오 세이(荒尾精), 다카하시 겐조(高橋健三), 무쓰 미노루(陸實), 후루쇼 요시카도(古莊嘉門), 다나카 겐도(田中賢道), 시바 시로(柴四朗),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후쿠모토 마코토(福本誠) 등이 참가해 겐요샤의 지사 2백여 명으로 한 부대를 조직해 아라오 세이가 총대장이 되어 가기로 되어 있었다. 개전이 예정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계획만으로 끝났는데, 당시 아라오 세이는 장백산(長白山) 주변에 신국가를 건설하려는 다른 계획을 품고 있어 그 국가의 조직과 통치의 일 등을 적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나중에 아라오가 후쿠모토 니치난(福本日南)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니치난은 부재중이었는데 부인을 만나 자신의 머리를 극적이면서 “그때는 바보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웃고 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