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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아선각지사기전 東亞先覺志士記傳
일러두기

쓰쿠다(佃) 등의 진력과 오시마 여단에 종군 천우협 여러 동지가 경성에 들어가자 경성에 체재 중인 쓰쿠다 노부오(佃信夫)와 니시무라 도키히코 덴슈(西村時彦天囚) 등은 협도를 오랫동안 세상의 눈을 피하는 경우에 두는 것은 좌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보고,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 및 연대장 다케다 히데야마(武田秀山) 대좌를 방문해 일청 개전의 동기에 있어서는 천우협도의 공로가 적지 않고 또 그들이 적군의 배치 상황 및 그 패주의 상황 등을 실제로 보고 온 것은 책전(策戰)상 큰 참고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공적과 심정을 이해하여 당국의 오해를 제거하고 국가를 위해 그들이 행동을 자유롭게 하도록 배려해 주기 바란다며 진력으로 의뢰했다. 오시마 소장과 다케다 대좌도 이를 듣고 크게 동정했는데 정부에 대해 구해(救解)의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서는 더욱 무언가 군대에 직접 공헌하는 일을 한 다음 그 공적을 이유로 당국자를 이해시키는 것으로 하고 싶다는 의견으로, 그것에는 중국의 패잔병이 평양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정찰하여 보고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춘천 방면의 정찰 이러한 사정으로 천우협의 지사는 중국군의 뒤를 쫓아 다시 조선 내지로 진입하게 되었는데, 당시 성환의 패잔병은 다수가 청주로 도망쳤고 아산의 패잔병은 공주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공주로 도망친 패잔병도 다시 청주로 가서 강원도로 들어갔으며, 그곳으로부터 평양으로 향하는 것 외에는 달리 적당한 퇴로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렇다면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지름길을 취해 강원도 춘천부로 나가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우협 동지는 급히 경성을 철수해 다시 세분고의 민가(閔家)의 별장으로 들어가 안성에 있는 혼마 규스케 및 나이가 어린 이노우에 도사부로를 제외한 12명이 준비를 갖추고 춘천을 향해 출발했다. 제사(諸士), 눈물을 흘리며 병이 든 우치다와 결별하다 그런데 강원도의 가평 부근까지 도달했을 때 아직 쇠약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한 몸으로 무리한 여행을 계속해 온 우치다는 피로가 심해지고 발열까지 있어 완전히 보행하기 곤란한 상태에 빠졌다. 일동이 노상에서 휴식하는 중에 옆의 작은 개천에 발을 담그고 열기를 식히려고 하는 우치다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스즈키와 오하라가 걱정하며 병의 상태를 물어보니 강인하고 의연한 우치다는 초췌해진 얼굴을 들어 “피곤한 데다가 여병(餘病)이 도진 것으로 보여 열이 상당히 높은 것 같다. 걷는 것이 힘들지만 어쨌든 쓰러질 때까지 한다는 각오로 나아갈 결심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우치다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곰곰이 지켜보고 우려하는 기색을 띠었는데 “자네는 여기에서 돌아가는 것으로 하자. 그 몸으로는 이러한 여행은 매우 견뎌낼 수 없다. 앞으로 무리해서 여행을 계속한다면 목숨이 위험하다. 천천히 걸어서 경성으로 돌아간 뒤 정양하는 것이 제일이다. 경성에서 우리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 바란다.”라며 귀환을 권했다. 우치다는 “아니,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춘천까지의 거리는 경성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2~3리나 가깝고 경성으로 잘 돌아가더라도 과연 무사할지 어떨지 예측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춘천으로 강행하여 적이 온다면 돌격해 전사하겠다. 그쪽이 남자의 숙원이다.”라며 우치다는 어떻게 해서든 뒤로는 물러서지 않을 결심을 보였다. 스즈키도 오하라도 그 심정을 살피고 동정하고 또 망설였지만 이윽고 격려의 말을 하며 “그러한 것을 말하지만 그 상태로는 자네 한 사람 때문에 일동의 진행을 방해하여 중요한 시기를 놓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이를 악물어도 미치지 않는 결과를 볼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나아가는 것은 단념하기 바란다.”라고 권했다. 우치다는 그래도 여전히 승복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는데 두 사람이 돌아가며 말을 다해 재삼 재사 설득하는 가운데 겨우 전진을 단념하고 경성으로 돌아갈 것을 승낙했다. 다른 사람들은 세 명이 이러한 비장한 문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점점 나아가고 있었는데 뒤에 스즈키와 오하라가 따라붙어 우치다를 돌아가게 한 사정을 자세하게 말했다. 그것을 듣고 모두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본의 아니게 단지 홀로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 우치다는 발길을 돌려 걸어가려고 하였는데 한 걸음에 헐떡거리고 두 걸음에 헐떡거려 도저히 경성을 향해 걸어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몸 상태였다. 그러나 왔던 길의 근처에 조선 정부의 화약제조소가 있어 그 무렵 휴업 중으로 경비원만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겨우 그곳까지 당도하여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했다. 요시쿠라, 오사키에게 전봉준을 재차 방문할 뜻을 말하다 한편 요시쿠라 오세이는 춘천으로 향하는 도중에 점차 동학당의 일이 떠올라 오사키 마사요시를 향해 “우리가 중국의 패잔병을 추격하여 그 상황을 군대에 보고했다고 해서 우리 무리의 목적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기 때문에 자네와 나는 일행과 헤어져 경성으로 돌아가 전라도의 운봉으로 가서 전봉준 등과 만나 자세하게 오늘날의 형세를 설명하고 7월 초순의 약속을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조선의 개혁은 앞으로 큰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크게 자중할 필요를 말하여 그들이 그릇된 믿음에 따라 일본군에게 반항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일본은 조선을 점령할 것이라고 하는 오해를 품고 우리 군에 반항하려는 일이 있다면 동학당은 전멸을 면할 수 없다. 동학당이 그러한 슬픈 지경에 빠져 스러지게 된다면 천우협의 신의는 명실공히 땅에 떨어진다. 자네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하며 상담했다. 오사키는 그것을 듣고 “자네가 말하는 대로 나도 부동의를 표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지금 바로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네와 내가 경성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관헌이 주시해 이곳으로 숨고 저곳으로 도망가는 경우에 빠져 당국의 오해를 풀 수가 없다. 만일 이 오해를 푸는 일 없이 운봉으로 들어가 동학당과 책동한다면 도리어 동학당에 누를 끼칠 뿐이다. 그것보다는 먼저 춘천으로 가 중국 패잔병의 모습을 정찰해 그것을 보고한 뒤 서서히 자네가 말한 시도를 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도중부터 돌아가는 것에 반대했다. 요시쿠라는 승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 문제는 제기하지 않았다. 오사키 등 세 사람의 선발 정찰 일행은 세분고를 출발해 이틀째 저녁 유명한 철파령(鐵破嶺)의 산기슭에 도착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춘천 지역의 산으로 향하는 산기슭으로부터 춘천까지의 거리는 약 5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일동은 산기슭의 민가에서 하루 자기로 결정했는데 산의 건너편은 적지이기 때문에 다음 날 산을 넘어가기에 앞서 그날 밤 안에 선발대를 파견해 상황을 정찰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 선발대=정찰대의 임무를 맡은 것이 오사키, 치바, 다나카 세 사람으로 그들은 산악이 중첩되어 야간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출몰해 가축을 해친다는 오르고 내리는 3리의 험한 길을 돌파하기 위해 준비한 다이너마이트를 휴대하고 과감하게 나섰다. 옅은 달빛은 나무 그늘에 가려져 암담한 야경이 무서운 가운데를 세 사람은 급경사의 구불구불한 험한 비탈을 지나면서 서로 말을 걸고 도와주면서 기어올라 두 시간 정도에 정상에 도달했다. 여기서 수십 정(町)을 더 가서 겨우 내리막 비탈을 만나 상대편 산기슭까지 완전히 내려온 것이 한밤중인 12시를 조금 지나서였다. 이윽고 촌락 하나가 나타났는데 연도의 집들은 야간인데도 집 앞이나 도로 위에 많은 불을 피워 놓고 모두 아직 잠자지 않고 무언가 소란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쩌면 청군에게 부탁받고 향도를 위해 횃불을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상해하며 어느 집에 들어가 물어보았더니 “더위가 심해 잠들기 어렵기 때문에 불을 피워 벌레의 습격을 막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조선의 우란분(盂蘭盆)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아 오사키가 남자 한 명의 목덜미를 잡아 쓰러뜨리고 칼을 빼는 동작을 하며 위협하자 노인 한 명이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그대들은 결코 수상해하지 말라. 불을 피우는 것은 이 촌락의 풍습인 일종의 제례이며 매년 이를 집행하고 있다.”라고 변명하며 목숨을 구해 달라고 청했다. 나아가 다나카가 장기인 조선어로 그 노인을 심문해 보니 일본의 우란분(盂蘭盆)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로부터 잠시 나아가면 강이 있어서 한밤중에 건널 수도 없기 때문에 세 사람은 민가의 처마 밑에 누워 밤을 밝히고 다음 날 아침 배를 불러 맞은편 강가로 건너가 1리 남짓을 나아갔는데 중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더 나아가 춘천 바로 앞 1리 반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다. 그곳부터는 춘천의 구릉이 바라다보여 더욱 위험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춘천의 청군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조선인이 신기한 듯이 모여드는 것을 붙잡아 시험 삼아 물어보니 “2~3일 사이 청군의 왕래는 일정하지 않지만 현재는 수백 명이 모여 있다고 지난번 춘천에서 온 자가 말했다. 그대들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춘천으로 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부디 곧바로 되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청국의 강병들이 그대들을 향해 어떠한 폭거를 할지 예측하기 어렵다.”라고 친절하게 충고하였다. 세 사람은 그 호의에 감사하며 “청군이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아직 온 적은 없지만 청국군이 춘천에 온 이래 조선인이 청국군의 부탁을 받아 매일 상황을 조사하러 온다. 오늘도 왔다가 이미 돌아갔다.”라고 대답했다. 이로써 조금 요령을 얻었기 때문에 그 조선인에게 명하여 술을 사 오게 해 두 되 정도 탁주를 대부분 그들에게 주고 “청군 또는 정탐하는 조선인이 오더라도 우리들이 왔다는 것은 결코 알리지 말라.”라고 타일러 두고 세 사람은 원래 온 길로 되돌아갔다. 들판의 집 한 채 이보다 앞서 세 사람은 춘천에서 3리 정도 떨어진 들판 속의 집 한 채에 들러 휴식하였을 때 그곳이 한때 근거지로 적당한 곳임을 확인하고 나중에 6~7명의 일본인이 한 마리 짐말과 함께 올 것이므로 자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전해 달라고 부탁해 두고 출발했는데, 과연 세 사람이 돌아와 보니 동지가 도착해 있었다. 요시쿠라, 니시와키의 되돌아감 그들이 철파령(鐵破嶺)을 넘을 때 후속조 속에 있던 요시쿠라와 니시와키는 병 때문에 진행 불능이 되어 일행과 헤어졌다. 적 기병의 습격 그날은 이곳에서 하루 자기로 정하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오사키, 시라미즈, 구사카, 오쿠보 네 명이 전진해 낮 동안에 오사키가 치바, 다나카와 함께 왔던 지점까지 나아가 여러 가지로 정찰에 힘썼으나 아무런 이상을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민가의 마당에서 모기를 쫓는 불을 피우면서 경계하고 있자 다케다가 적병의 공격 소식을 받았다며 퇴각을 독촉하기 위해 달려왔다. 적은 그들이 있는 후방의 샛길에서 습격해 왔다고 말해 다케다가 독촉하는 대로 근거지로 철수했는데 그것은 조선인들의 가짜 소식으로 보이며 그날 밤은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다나카와 치바, 오사키, 구사카, 시라미즈, 오하라 6명이 정찰을 위해 전진하자 적의 기병 수십 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정면으로 충돌해서는 중과부적인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서둘러 근거지로 철수해 일동을 데리고 다시 험한 철파령을 넘어 전전날 하루 잤던 지점까지 퇴각했다. 시라미즈, 오쿠보 또한 돌아가다 이곳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춘천에서 낭천(狼川)에 이르기까지 중간 지점인 험한 구현(駒峴)을 목표로 나아가기로 했는데 시라미즈 겐키치는 소집령을 받아 군대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귀국길에 올랐고 오쿠보 하지메도 병에 걸려 전진하기에 곤란을 느꼈기 때문에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명이 가는 것과 교대로 혼마 규스케가 안성에서 달려와 참여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이에 8명의 세력이 되어 조선인 마부를 데리고 샛길을 통해 구현으로 서둘러 갔다. 이 조선인 마부는 세분고 출발 이래 일행을 수행하고 있는 젊은이로 일본어를 이해하고 매우 충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일행으로부터 츄스케(忠助)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누구로부터도 츄스케, 츄스케라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드디어 구현 산기슭에 접근했을 때 동지는 이전 실패를 거울삼아 이곳에서는 일본인의 모습을 적의 시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취할 필요를 느끼고 다나카 지로가 츄스케에게 정찰 방법 등을 상세히 가르쳐 주고 시험 삼아 구현의 산기슭까지 파견했다. 츄스케는 단신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충실하게 나섰는데 잠시 지나자 당황한 모습으로 뛰어 돌아와 “청군 수십 명이 고개 산기슭을 향해 전진해 왔다. 빨리 가지 않으면 그들은 고개를 넘어가 버린다.”라고 보고했다. 협도들이 구현에서 청군을 요격하다 아이구!라고 하면서 일동이 달려가려는 것을 다나카와 치바가 입을 맞추어 제지하며 “먼저 우리 두 명이 츄스케를 향도로 삼아 지금 한 차례 보고 오겠다. 그런 뒤에 행동을 결정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달려 나갔다. 잠시 뒤 뛰어 돌아온 다나카와 치바는 “츄스케가 보고했듯이 청군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수 정(町)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보다도 먼저 고개 밑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츄스케를 고개 입구까지 가게 하였으니 이윽고 돌아올 것이다. 빨리 준비하자.”라고 일동을 독촉했다. 일동은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다.”라고 기운을 내 기다리고 있었는데 츄스케가 돌아와 “고개 입구에는 왼쪽에 한 집, 오른쪽에 두 집 민가가 있는데 모두 빈집이다.”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츄스케에게는 남아서 짐말을 지키게 하고 일동이 고개 산기슭으로 급히 가 보았더니 츄스케가 말한 대로 세 집은 빈집이었다. 오하라는 우측 민가 안에 숨어서 권총을 적의 정중앙에 쏘아 신호를 보내는 임무를 맡고, 스즈키와 다케다는 그 신호와 동시에 폭탄을 던져서 적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자는 옆에 있는 콩밭과 수수밭에 숨어서 적이 도주하려고 하는 퇴로를 끊어 항복시킨다는 작전을 정하고 각기 그 부서에 임했다. 이러한 줄도 모르고 청군 한 부대가 그곳으로 오자 오하라는 권총을 계속하여 두세 발 쏘아서 신호를 보냈고 그와 동시에 굉장한 폭탄 파열음이 울려 누군가가 ‘아!’ 하고 외치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밭에 숨어 있던 여러 명은 일제히 칼을 빼 들고 달려 나갔는데 수수와 콩 덩굴이 방해해 생각대로 달리지 못하고 겨우 도로로 나갔을 때에는 청군은 이미 흩어져 건너편으로 셀 수 없이 도주했다. 오사키는 마지막으로 달리는 청군을 추격해 바로 칼로 베려고 하였으나 한 발자국 뒤처져 마침내 놓치고 말았다. 다른 자들도 칼을 치켜들면서 추격했으나 이 또한 모두 적을 놓쳤다. 다나카, 청군을 쓰러뜨리다 그곳에 다나카가 끝에서 선혈(鮮血)이 떨어지는 큰 칼을 들고 “한 명도 놓치지 말라. 해치우자.”라고 외치면서 달려왔는데, 그때 적은 이미 어디론가 도주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고개 산기슭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는 청군 한 명이 피에 젖어 쓰러져 있었다. 이자는 소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이 늦어져 다나카에게 베인 것이다. 숨이 끊어질 듯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나카는 “고통을 주는 것은 무사의 정이 아니므로 빨리 죽여 주겠다.”라고 하며 인후부에 칼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혼마 규스케는 “중국인은 병졸 한 명에 이르기까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조금 조사해 보겠다.”라고 말하고 칼로 옷을 잘라서 복대를 조사했으나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가 “이래서는 청군이 아니라 가난한 병사군.”이라고 너스레를 떨었기 때문에 일동은 웃음을 터뜨렸다. 혼마가 다시 칼로 속옷을 끌어당겨 조사하니 과연 멕시코 은화 5매를 감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만큼 나왔으면 가난한 병사라는 칭호는 취소해야 한다.”라고 말해 모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병사가 타고 있던 소의 등에도 다소 화물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사했더니 탄환 수백 발과 조선의 민가에서 약탈한 것 같은 식기 등이 드러났다. 탄환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조선인에게 명해 부근의 계곡물에 버리게 했는데 동지가 숨어 있던 빈집의 주인이 옆에서 청군의 약탈이 무서워 산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일행은 포획한 소를 그 남자에게 주자 뜻밖의 선물에 감사의 말을 되풀이했다. 낭천(狼川)군수의 사례 지금부터 낭천으로 직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취해 후속해 오는 청군과의 조우를 피할 것인지 일동은 잠시 평의를 했는데 논의가 좀처럼 결정되지 않아, 일단 이 고개의 정상에 올라 청군이 만일 온다면 돌을 투하해 막기로 결정하고 뜨거운 날씨에 쏟아지는 땀을 훔치면서 올라갔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조선인 여러 명이 마침 일행의 뒤를 쫓아 올라와 그들에게 부근의 지리를 자세히 물어본 결과, 황해도 방면으로 가더라도 평안도 방면으로 나가더라도 일단 낭천으로 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령 적이 앞뒤로부터 압박해 강원도의 흙이 되더라도 천명이다. 두려워하는 바 없이 전진해야 한다고 하여 다시 고개를 내려와 경계하며 나아갔다. 연도에는 이르는 곳마다 민가가 있어 집집마다 남녀노소가 뛰어나와 일본인이다, 일본인이다라고 서로 말하면서 환영하는 기색을 띠고 물을 퍼 와서 ‘청물물’(맑은 물이라는 뜻)이라 말하며 권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청군의 포학함을 그치지 않고 호소했다. 이윽고 낭천에 가까워지자 시가 앞에는 매우 넓은 강이 있고 지방에서는 드문 당당한 교량도 가설되어 있었다. 일행은 곧바로 낭천 관아를 방문해 군수와 회견을 하니 “공들은 남은 더위가 매우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방문하였다. 매우 기쁘기 그지없다.”라는 등 교묘한 인사치레로 맞이하고 “이번 일청 간의 전쟁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전(義戰)으로 우리 국민의 감사함이 매우 크다. 나는 불초하지만 군수의 직책을 맡고 있다. 시민을 대신해 깊이 감사한다.”라고 하며 포도물 등을 가져오게 하여 매우 환영했다. 다나카가 “2~3일 전부터 청국의 패잔병이 속속 귀 영내를 통과해 연도의 민가를 약탈하고 매우 횡포를 저지르고 있는데 귀관은 이를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청군의 횡포가 있음을 듣고 있지만 미력하여 어떻게도 하지 못해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라고 답하며 우려의 기색을 나타냈다. 청군의 포위와 협도의 기담(機膽) 그러한 때 마침 4~5명의 조선인이 허둥거리며 달려와서 “수백 명의 청군이 덮쳐 와 강의 대안에 진을 취하고 총구를 시가 쪽으로 향하고 있다. 공(公)들 일본인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한 부대는 시내에도 침입해 오려고 하고 있다. 빨리 어디론가 도망가시라.”라고 불안에 차 보고했다. 이것에는 일동도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거만한 태도로 “청국의 약한 병사 몇백 명이 내습하더라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들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은 아니지만 일당백(一當百)은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8명이기 때문에 일당백이라면 바로 8백 명을 감당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라.”라고 호언하고 위용을 나타냈다. 나아가 “청군은 약졸뿐인데 그 숫자가 많기 때문에 부족함을 가지고 무리에 임하는 데는 비상 방책이 필요하다. 관아의 여러 관리 및 시민에 대해서는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시가의 여러 곳에 불을 질러 불의 기세를 타고 폭탄을 던져 청군이 낭패하고 혼란된 틈을 타 일본도를 휘둘러 시체로 산을 쌓아 보이겠다.”라고 말하자 경보(警報)를 가지고 온 조선인도 여러 관리도 실색하고, 군수는 안색이 창백해져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마치 좌상(坐像)과 같이 자지러져 버렸다. 그리고 보고하러 온 조선인들은 당황하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혼마의 무사 흔들기 혼마, 구사카 두 명이 재빨리 군아(郡衙)의 누문(樓門)에 올라가 적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는 사이에 일동은 그곳에 운반되어 온 밥상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이윽고 오사키와 다케다가 혼마와 구사카를 대신해 감시 임무를 맡기 위해 누문으로 올라갔다. 혼마는 두 명을 보고 전방을 가리키면서 “수백 명의 청군은 이미 강둑까지 와서 총구를 향해 우리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그 수는 점차 증가해 내가 누문에 오르고 나서도 백 명 정도는 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시내에 들어온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다케다는 혼마의 무릎 주위가 자주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추태는 무엇이냐. 무릎이 지진이 온 것같이 떨리고 있네. 힘을 단전에 주고 있어라.”라고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 혼마는 의기양양하게 “너는 아직 이러한 용감한 모습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즉 무사의 흔들기라는 것이다.”라고 독특한 억지를 부리며 누문을 내려왔다. 오사키와 다케다가 누문 안에서 바라보니 수백 명의 청군이 강둑을 이용해 배를 깔고 엎드려 총구를 군아(郡衙) 쪽으로 향하고 명령이 내리면 발사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아직 시내로 나아가 침입하려는 형색은 없었다. 오사키는 동지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자 오고 있는 치바와 만났다. “적은 발화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아직 시내에 침입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아에 접근해 와 발포를 시작한다면 좌시할 수 없는 큰일이 되기 때문에 적이 올 만한 가로(街路)를 정찰하여 만일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자 치바도 “그렇다.”라고 동의했다. 그곳에 마침 오하라, 구사카가 와서 네 명은 사방으로 나뉘어 가로의 모습을 자세히 정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정찰 결과 모두 적이 침입할 형세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각기 철수해 돌아왔다. 위기일발 다케다가 누문에서 보고 있으니 적의 형세에는 변화가 없지만 조선인이 청군 두세 명과의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스즈키와 다나카가 누문 아래로부터 큰 소리로 “적군은 이미 우리의 인원이 적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용이하게 퇴각하지 않는다. 특히 이 시가는 양쪽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다른 두 방면은 강이기 때문에 도망가려 해도 도망칠 수 없다. 선수를 치면 다른 것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나아가 적 안으로 깊숙이 쳐들어가 칼이 부러질 때까지 접전하는 수밖에 없다. 제군은 오라.”라고 외치며 칼을 머리 위로 치켜 들면서 달려 나갔다. 오사키는 누문에서 이 모습을 보고 “기다려! 기다려! 적은 우리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다. 한 발자국이라도 시가를 벗어난다면 저격의 표적이 되어 한 명도 적에게 접근할 수 없다. 쓰러질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스즈키, 다나카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적진 앞으로 갔기 때문에 오사키는 초조해져 “빨리 스즈키를 말려라. 다나카를 제지하라.”라고 고함을 쳤다. 이 소리를 듣고 오하라와 치바가 달려 나와 겨우 두 사람을 제지했다. 조선인의 재치 다케다와 오사키는 여전히 누상에서 적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불가사의하게도 적은 연이어 퇴각을 시작했다. 두 명이 수상히 생각하여 무심결에 누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것을 확인한 청군은 총을 거꾸로 하고 발걸음 속도를 내어 퇴각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지난번부터 청군 사이를 왕래하고 있던 조선인이 와서 “청국군은 이미 퇴각을 시작했기 때문에 곧 한 명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공들은 안심해도 좋다.”라고 말했다. 다나카와 스즈키는 그것을 믿지 않고 “너희들은 청군과 통모하여 우리를 궁지에 빠트리려 하는 것인데, 무례한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라며 주먹을 휘둘러 일격을 가하려고 했는데 누문에서 내려온 오사키와 다케다는 그것을 보자 달려와 다나카와 스즈키를 달래고 “청군이 퇴각한 것은 사실이다. 이 남자가 말한 대로 이미 강둑에는 병사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말하자 모두 의외의 말에 놀라고 그렇다고 해도 왜 퇴각했는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서로 말하고 있으니 조선인은 “사실은 우리가 공들이 시가의 여러 곳에 불을 질러 맹화(猛火) 속에서 적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했고 침소봉대의 허구의 말을 통해 청군을 퇴각시킨 것이다. 처음에 청군 대장에게 일본인이 50여 명이나 군아에 자리 잡고 일찌감치 청국군이 오는 것을 탐지하여 일동이 결속해 죽음을 각오하고 폭탄을 준비해 청국군이 관아로 밀려온다면 시가지 여러 곳에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져 적이 낭패한 틈을 타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진해 50여 명이 남김없이 전사하려는 대단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대국 군대(청군을 가리킨다)는 강호(强豪)하고 또 일본인보다 다수이지만 결사의 각오인 일본인과 만나면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것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시가지를 재로 변하게 한다면 시민의 곤란은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라건대 이것을 생각해 속히 퇴각할 것을 청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더니 마침내 우리의 말을 받아들여 퇴각하기에 이른 것이다.”라고 매우 득의에 찬 모습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이에 위난(危難)이 사라지고 안심한 일행은 더욱 의기양양해진 점이 있었지만 군수를 비롯해 조선인 일동의 기쁨과 감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스즈키, 오하라의 별동대 여기까지 다가온 일행은 이미 더 이상 나아가 청군을 추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청군이 평양을 목표로 철수하고 있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신속하게 황해도로 나와 여단 본부에 적의 퇴각 상황과 어느 길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보고하는 것이 급무였다. 일행은 청군이 퇴각하고 있는 큰 도로를 피해 그곳으로부터 개성 방면으로 나가는 샛길을 선택해 피로한 몸을 북돋우면서 힘들고 결핍된 여행을 계속해 가는 사이에 4일 정도가 지날 무렵 스즈키 덴간과 오하라 요시타케는 매우 피로해져 마침내 별동대를 취해 귀환하게 되었다. 충실한 마부 츄스케도 역시 수행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약간의 임금과 끌고 온 짐말을 주어 귀환길에 오르게 하고 나머지 다나카, 치바, 구사카, 다케다, 혼마, 오사키 6명만이 개성을 향해 나아갔다. 삭녕지대(朔寧枝隊) 스즈키 등과 헤어져 2박한 뒤 그들이 삭녕(朔寧)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바 삭녕지대라고 칭하는 우리 육군의 야마구치(山口) 대대가 그곳에 도착해 주둔 중인 것을 만났다. 다케다와 혼마 다케다 한시는 그 무렵 피로가 심해져 전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행과 헤어져 인천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고, 또 혼마는 삭녕지대의 통역으로서 남기로 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마침내 4명의 소수가 되었다. 나아가 도중에 2박을 한 뒤 드디어 개성에 도착해 부아문(府衙門)에 있는 우리 오시마 혼성여단 본부를 방문해 상세한 보고를 하였다. 오시마 여단에 보고, 평양 방면으로 종군 오사키가 일행을 대표해 오시마 여단장을 비롯해 여러 막료 앞에서 상세한 상황을 보고했을 때 여단장은 일일이 수긍하고 경청했는데 보고가 끝나자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 참모는 입을 열어 “여러분의 노고는 너무나도 감사한데 조금 시기(時機)가 늦었다.”라고 말하고 “지금부터 귀도(歸途)에 오르는가.”라고 물었다. 오사키가 “귀 여단에서 지장이 없다면 평양까지 종군하고 싶다.”라고 대답하자 “여러분이 그러한 뜻이라면 여단으로서도 안성맞춤이다. 진군 중 또다시 여러분의 노고가 필요한 일이 생길 경우는 국가를 위해 진력해 주기 바란다.”라는 것으로 일행은 그 이후부터 식사를 육군의 취사부로부터 제공받는 것으로 되었다. 중화 정찰 임무 여단 본부와 함께 개성을 출발해 계정(雞井), 영성(嶺城), 평산(平山), 남산점(南山店), 신막(新幕), 서흥(瑞興), 봉산(鳳山)의 각지에서 숙영을 거듭하며 황주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중대한 임무를 나가오카(長岡) 참모로부터 부여받았다. 그것은 황주에서 몇 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중화의 적정을 정찰하는 임무로 나가오카 참모도 매우 곤란한 일임을 말하고 지형, 적의 상황 등을 말하며, “여러분이 이것을 수행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맡아 주기 바란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서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때 동지를 대표한 오사키는 일언지하에 이를 인수했다. 오사키는 그 자리에서 정찰상의 주의를 듣고 휴대 여행 식량인 도명사(道明寺) 건빵 등을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 동지에게 알리자 모두 “오랫동안 무료함을 탄식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통쾌한 일을 맡는 것은 본심이다.”라고 의기가 높아졌다. 이렇게 동지들의 투지가 샘솟고 있는 가운데 한 명의 병사가 와서 “이 집에 오사키라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오사키가 나와 “내가 오사키다.”라고 하자 병사는 “나는 오하라 중대에서 온 사람인데 중대장이 귀하에게 부대로 와 주기 바란다 하므로 지장이 없다면 지금 동행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오하라 대위라는 사람은 전에 직산의 전투에서 독립중대를 이끌고 천우협의 지사와 함께 진격한 중대장이다. 오하라(小原) 대위의 진정(眞情) 병사의 안내를 받아 오사키가 중대로 가자 대위는 설사를 했다며 누워 있었는데 곧바로 일어나 일단 인사한 뒤 “여단으로부터 중화 정찰을 인수하였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에 오사키는 그렇다는 것을 대답하였다. 대위는 중화 정찰은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이라며 군대에서도 술책이 다해 공연히 고심하고 참담한 상태이다. 전에 기병 소위에게 하사 1명과 병사 2명을 붙여서 정찰하게 했는데, 소위는 험한 마령(馬嶺)의 산비탈을 넘자 곧바로 복병의 포위공격을 받아 병사 2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런데 겨우 자신만이 도망쳐 돌아온 하사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지형의 험요(險要)함을 교묘하게 이용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 뒤 자주 조선군으로 하여 정찰하게 하였지만 이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내용의 실상을 알렸다. 그런 후 “실례이지만 귀하들은 군인 이외의 몸으로 이 같은 결코 생환을 기하기 어려운 위험한 지역에 가는 것은 특히 국가를 중요시하여 임하는 귀하들의 평소 포부에 의한 것이 아닌가. 만약 귀하들이 중지하는 것을 웃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장부의 뜻이라고 할 수 없다고 믿는다. 나는 굳이 여단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귀하 등을 위해 안타까운 나머지 이에 충언하는 바이다.”라고 절절한 진정을 피력했다. 오사키의 감격과 단호한 결심 오사키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대위의 진정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단 인수하여 비상식량까지 수취하고 이미 출발 시각까지 약속한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사퇴하는 치욕을 생각하여 대위의 충언을 따르는 것은 사지에 몸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더욱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결연히 대위를 향해 깊이 후의에 감사하였다. 그다음 “지금으로서는 이미 어떻게 해도 승낙을 취소할 수는 없다. 부디 우리들의 아둔하고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충언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사는 하늘에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모두 천명에 맡길 뿐이다. 중화 정찰의 어려운 일을 만난 것도 천명이다. 어떠한 위험한 지역에 가더라도 반드시 죽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다미 위에 있어도 결코 안전하다고 보증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대위의 두터운 정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잠시 우리들의 뜻에 맡겨 그 고집을 용서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대위는 “용기 있는 결심을 듣고 도리어 나의 속언(俗言)을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진중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지만 동료가 각기 보관해 둔 소주를 따르며 송별의 잔을 들자.”라고 말하고 부하 병사에게 명하여 오사키에게 권했다. 그 태도, 그 준비, 정말로 명실이 다 갖추어져 있는 좋은 무인으로 오사키는 까닭 없이 대위의 위인에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선물과 빈 찻잔 오사키는 이윽고 취해서 걸음을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대위에게서 대접받은 남은 소주를 찻잔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동지를 향해 “어이, 선물을 갖고 돌아왔다.”라고 말하며 내민 것을 보니 돌아오면서 뒤뚱거려 대부분 없어져 버렸다. 구사카가 비어 버린 찻잔을 받아 들고 “음, 냄새만큼은 남아 있다.”라며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것도 우스꽝스러웠다. 오사키로부터 오하라 대위의 말을 듣고 동지들도 그 두터운 정에 감격하였다. 마령(馬嶺)의 험준하고 중요한 곳에 무언가 있다 특히 군인 출신인 다나카와 치바는 “마령에 이르는 지형을 생각하더라도 오하라 대위가 말한 대로 정찰 효과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지에 빠지는 것과 같다. 오하라 대위의 충언은 실로 적절한 충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다. 신명을 바쳐 군국(君國)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데 어떠한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라며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구사카도 “하늘의 도움에 의해 일을 한다면 무언가 이루지 않겠는가. 완전히 정찰을 마치고 여단장을 비롯해 참모관 등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도 유쾌하다.”라고 크게 분발했다. 오하라(小原) 대위의 전별(餞別) 다음 날 아침 오사키, 다나카, 치바, 구사카 네 명은 드디어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용감하게 전초선을 향해 출발했다. 그때 뒤에서 큰 소리로 오사키를 부르는 자가 있어서 뒤돌아보니 한 명의 군인이 오사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달려왔다. 멈추어 서서 기다리자 그는 오하라 중대의 한 조장(曹長)이었다. 조장은 오늘 아침 중대의 큰 짐가방을 찾아 두 가지 물품을 발견했다며 브랜디 한 병과 말린 가물치 한 묶음을 보여 주며 “중대장으로부터 증정하라는 명령을 받고 숙사로 갔더니 이미 출발한 뒤였기 때문에 서둘러 따라서 달려온 것입니다. 대장으로부터 무언가 정찰 중에 위안제가 되면 좋겠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라고 알렸다. 오사키는 조장의 노고에 감사함과 아울러 몇 번이나 대위의 후의와 깊은 정에 감사하며 그 감사의 뜻을 대위에게 전하도록 의뢰했다. 조장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이러한 큰일에 임하며 태연하게 평시와 같은 태도를 보고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며 신명을 돌아보지 않는 지사일 것이기 때문인가 하고 감동했습니다. 하늘도 이러한 유용한 지사에 대해 헛되이 죽음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생환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부디 분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일개 하사인 조장으로부터의 이러한 말에 오사키는 더 한층 감격의 정이 깊어졌다. 조선 옷으로 갈아입다 네 명은 전초선(前哨線)의 대장을 방문해 정찰상 편의를 주도록 교섭해 두고 조선인 부락에 들러 조선 옷을 요청해 아주 조선인처럼 차리고 더 나아가 빈집 한 채를 발견하여 그곳을 임시 근거지로 정했다. 여기에서 오하라 대위가 기증한 브랜디를 꺼내 말린 가물치를 안주로 서로 무운(武運)을 축하한 뒤 일몰을 기다리는 동안 조용히 옅은 잠을 자며 꿈을 꿨다. 어스레할 무렵 광주(廣州) 고원에 들어가다 일동이 눈을 뜬 시각은 오후 5시를 조금 지나서였는데 날이 저물어 어스레한 빛이 창연할 무렵 마침내 광주 고원의 입구까지 나아갔다. 그때 우리 군의 상등병이 세 명의 병사를 데리고 전방에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마주치자 그 상등병은 멈춰 서서 누구냐고 물었다. 길에서 상등병이 수상해하다 일행은 일부러 조선어로 우리는 보통 여행자로 아무런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답하자 조선어를 알지 못하는 상등병은 일본어로 여러 가지 추궁했지만 일동은 엉터리 조선어를 연발하여 요령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중국의 간첩이라고 추정했는지 상등병은 병사에게 명하여 사격 자세를 취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일행도 놀라고 낭패하여 일본어로 “일본인이다, 일본인이다. 잠시 기다려 달라.”라고 외치고 재빨리 품속에서 여단 본부의 증명서를 제시했다. 이번에는 상등병 쪽이 낭패하여 부하를 제지하고 “일본인이라면 왜 처음부터 일본어로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무례는 하지 않았다.”라며 사과했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들은 중화를 정찰하러 가기 위해 이렇게 조선인처럼 변장한 것이고 그대들이 과연 우리를 조선인이라고 인정하는지 어떤지를 시험해 본 것이다. 무례한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라고 말하자 상등병은 “마령과 중화의 정찰은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이다. 부디 충분한 경계와 주의를 하면서 중임(重任)을 수행하기를 기원한다.”라고 정중히 경례하고 돌아갔다. 어스레한 빛은 점차 짙어져 갔는데 이로부터 앞길은 충분한 경계가 필요하므로 네 명은 2개 조로 나뉘어 도로 양측에서부터 밭 가운데로 서서히 전진했다. 마침 달이 없는 밤이고 더구나 하늘은 구름이 끼어 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이 되었다. 코를 잡혀도 모를 정도로 어둠 속을 기어가듯이 나아가는 가운데 반대편을 나아가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그 소재를 모르게 되어 버렸다. 네발 걷기와 모기의 맹렬한 습격 물론 소리를 질러 동료의 소재를 찾을 수도 없어 묵묵히 고양이같이 네발로 기어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밭 안에는 몇만 마리인지도 모를 모기가 맹렬히 덮쳐 무시무시한 우는 소리를 내며 틈이 있는 곳에 몰려들어 물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잠시 쫓으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땅 위로 떨어질 정도였다. 약 2시간 정도를 나아갔을 때 전방에서 따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적 척후병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들은 네 명은 전진을 멈추고 가만히 숨을 죽이면서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멈춰 있으면 모기의 습격은 더욱 맹렬해져 정말로 불에 지지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말발굽 소리는 점차 가까워 그 소리로 추측해 보면 4~5필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 기병의 말발굽 소리 적의 척후병은 네 명이 숨어 있는 바로 앞 수 칸 거리에 있는 곳을 통과했는데 이윽고 말발굽 소리는 멀어져 갔다. 척후병이 이곳을 아무 일도 없이 통과해서 간 것을 보면 부근에는 적이 숨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네 명은 소리를 질러 동지를 서로 부르며 한 장소에 모였다. 그리고 “이번에 지나간 것은 적의 척후병이기 때문에 이어서 또 이 방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전진할 때는 적지를 향하기 때문에 긴장하고 방심하지 않지만, 귀환할 때는 반드시 기분이 이완되어 적이 숨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안심하며 통과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 빈틈을 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쳐 죽이자.”라고 서로 말하고 길옆 근처에 몸을 숨기고 귀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밤은 더욱 깊어 갈 뿐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적의 척후병은 확실히 다른 길을 거쳐 돌아간 것으로 추측되었다. 마침내 모기의 습격을 견디기 어려웠던 오사키가 일어서는 찰나 눈앞 수십 칸 정도의 지점에 무언가 하얀 것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접근하여 보니 그것은 농민이 겹쳐서 쌓아 놓은 보리짚이었다. 오사키는 다행이라며 그 위에 올라가 몸을 눕히자 미풍이 불어와 매우 상쾌함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모기가 없어 갑자기 소생하는 마음이 들었다. 치바도 그 위로 올라가 두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 전방에서 총성이 일어나 그 소리가 점차 빈번해지고 이윽고 일제사격 소리까지 들려왔다. 총성이 빈번하게 들리다 한 시간 정도쯤 총성이 단속적으로 들려온 뒤 갑자기 또다시 정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처음 총성을 들었을 때 오사키와 치바 모두 보리짚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총성이 일어난 지점이 어디인지, 또 무엇 때문에 이러한 전투가 일어났는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을 뿐이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류하고 밤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자 마침내 동쪽 하늘이 차차 밝아져 지상의 물상이 몽롱하게 눈에 비치게 되었다. 네 명은 한 곳에 모여 총성에 대한 각자의 판단을 서로 말했는데 이 방면에 가장 풍부한 지식을 가진 다나카의 판단은 “총성이 일어난 곳은 분명히 마령 방면이기 때문에 적 중에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적중에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원인을 탐사하는 것이 정찰상 필요조건이다.”라는 것이었다. 치바도 역시 마찬가지 의견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나아가 그 방면으로 접근하기로 결정하고 잠시 전진하자 전방으로부터 돌아오는 일본군 5~6명과 마주쳤다. 척후병이 돌아옴 이 병사는 척후로 4~5정(町) 앞까지 가서 보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보고하러 돌아간다고 하면서 지나치려고 했다. 다나카가 “여기부터 5~6정 앞에 민가 몇 집이 있는데 그곳까지 가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민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곳에는 청군이 있어 위험하므로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다나카는 “척후병이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군은 우리를 따라오라. 보고할 만한 재료를 주겠다.”라며 병사를 독촉해 전진했다. 다른 세 명은 별동대가 되어 전날 밤 중국 기병 척후가 돌아간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그쪽으로 전진했는데 2~3정 정도 가자 다른 도로가 있었고 노면에는 말발굽의 흔적이 역력히 확인되어 중국 기병 척후가 이 도로를 거쳐 돌아간 것으로 짐작되었다. 말발굽 소리 역력 다시 2~3정 정도 더 나아가자 왼편에 2~3채의 민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서 만난 조선인에게 물어보니 “청군은 매일 2~3회 이 주변을 왕래하는데 대체로 아침 일찍이나 저녁 무렵에 온 적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한편 다나카는 병사를 데리고 청군이 있다는 민가로까지 가서 청군이 전날 밤까지 민가를 주둔지로 삼아 빈번하게 왕래하였지만 오늘 아침은 아직 병사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치바의 발병 이리하여 네 명은 다시 일체가 되어 마령의 산기슭을 목표로 잠행을 계속했는데 불행하게도 도중에 치바가 발병했기 때문에 구사카가 이를 간호하면서 돌아가게 되어 네 명은 서로 본의 아니게 이별을 고하고 광막한 들판 가운데 동과 서로 나뉘었다. 이제부터는 오사키와 다나카 단 두 명이 마령 방면으로 적의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 언덕의 그늘, 수목의 그늘 등 일체의 차폐물을 이용해 잠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여러 곳에서 논밭을 경작하고 있는 조선 농부가 두 명이 통과하는 것을 보며 잠행 모습을 수상하게 여겨 모두 잠시 일을 멈추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위험을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다나카 등 가면을 벗고 농부에게 적의 상황을 묻다 특히 그들 조선인 가운데 청군에 밀고하는 자가 있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여기에서 완전히 멈추기 때문에 두 명은 서로 대화한 다음 스스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을 이용하는 방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부근의 밭에서 일하고 있던 두 명의 조선 농부에게 접근해 다나카가 입을 열어 먼저 “이곳에 청군이 온 적이 없는가.”라고 물었더니 그 농부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표정으로 두 명을 자세히 보았는데 잠시 뒤 “아직 한 명의 청군도 온 적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다나카는 거듭 “너희들은 청군을 좋아하는가, 일본인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보냈는데 한 명의 남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청군은 도적이다. 인접한 마을 흑교(黑橋)에 침입해 와서 부녀자를 범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매우 폭행을 하였다. 그 포악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우리 읍에 온다면 읍민이 그들에 대해 이렇게 할 것을 약속해 두었다.”라고 말하고 들고 있던 낫을 들어 올려 힘을 다해 땅에 꽂아 보였다. 두 사람은 이것을 보고 “너희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일본을 위해 편의를 꾀해 주겠는가.”라고 질문하자 “가능한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마령까지는 몇 리인가.”라고 물었더니 “고개 밑까지 1리면 충분하다.”라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이 바로 “우리를 위해 아니, 일본을 위해 마령 위아래에 청군이 주둔하고 있는지를 조사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그 만큼의 일이라면 그대들이 휴식하고 있는 사이에 보고 오겠다.”라고 대답했다. 농부의 환대와 마령의 적 상황 이렇게 조선 농부는 점심식사 후 출발하는 것을 승낙하고 두 사람을 안내해 집으로 돌아가 멍석을 깔아 자리를 만들고 맑은 물을 퍼 와서 마시라고 권하는 등 매우 친절한 대우를 하였다. 그때 그 집의 사람이 조선인 한 명을 데리고 와서 두 사람에게 소개하고 “이 사람은 오늘 아침 마령 아래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고 지금 막 돌아왔기 때문에 마령의 상황은 이 사람에게 들으면 알 수 있다.”라는 것이므로 두 사람은 크게 기뻐서 질문을 거듭한 결과 그자는 아침 9시경 마령으로 갔는데 청군은 십수 일 전부터 중화에서 속속 마령으로 와 대부분은 고개 위에 주둔하고 일부는 고개 아래에 있는 4~5호의 민가를 점령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인데, 오늘 아침이 되어 어째서인지 전혀 청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모두 적막한 빈집이 되어 있었다는 것과 어젯밤의 총성은 고개 위와 아래에서 일시에 맹렬하게 발사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청군의 퇴각과 총성의 원인 및 그 상황 등에 관해서는 모두 전혀 판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이상은 스스로 현장을 조사한 다음 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조선인에게 깊은 인사말을 하고 고개 아래로 향했다. 청군의 퇴각과 현장조사 한 시간 정도에 고개 아래에 도달해 시선이 미치는 데까지 사방을 주시했는데 청군과 비슷한 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청군이 주둔하고 있던 민가에 도착해 가옥 내외를 조사해 보니 청군이 취사한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고 부근의 콩밭은 모두 말발굽에 유린되어 있었다. 밥알 등도 곳곳에 떨어져 있어 그것으로 살피더라도 퇴각 후 아직 많은 시간이 경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퇴각했는지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다나카의 군사적 눈으로 본다면 청군이 이 험준한 요새지를 버리고 퇴각한 이상 그들이 중화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려고 하더라도 도저히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마도 평양까지 물러나 그곳에서 일본군을 요격하려는 작전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네 사람의 보고와 여단의 전진 두 사람은 더 이상 깊이 나아가 정찰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빨리 돌아가 이 상황을 여단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해 고개 위 정찰을 보류하고 곧바로 귀로에 올랐다. 두 사람은 일몰 무렵 숙소로 돌아와 그날 밤 다나카가 여단 본부의 소재지로 가서 상세히 정찰 결과를 보고하자 여단은 이를 바탕으로 다음 날 아침 전진을 개시하기로 하여 그날 밤 안에 전 부대에 전진 명령이 전해졌다. 여단이 험준한 마령을 넘으려고 함에 따라 여단과 함께 전진 중이었던 네 명은 군대를 앞질러-치바는 복통이 회복되어 진군(進軍)에 참여하고 있었다–마령을 기어올라 민가로 가서 청군 퇴각의 사정을 조사해 보았다. 전날 밤의 총격과 신병(神兵)의 출현 그랬더니 고개 위아래로 진지를 펼치고 있던 청군은 무엇에 의해서인지 일본군이 어두운 밤을 타고 급습했다는 착각을 일으켜 무턱대고 발포하여 자신들의 총성도 일본군의 총성이라고 오인하여 전군이 낭패하고 퇴각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마치 그 옛날 물새 소리에 놀라 퇴각한 헤이케(平家)의 군세(軍勢)와 같이 청군은 안타깝게도 험준한 요새지를 포기했던 것이다. 부근 조선인의 말에 의하면 “청군의 장교는 일본군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아오르듯이 불의에 나타나 습격했기 때문에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게 되어 퇴각한다고 말했다.”라는 것인데, 이것을 들은 네 명은 하늘의 도움이 많은 황군(皇軍)을 위해 어쩌면 신병(神兵)이 나타나 청군을 위협한 것이 아닌가 하며 신비한 상상조차 자아냈다. 대동강 도보로 건널 지점의 정찰 혼성여단은 한 명의 적과도 마주치지 않고 한길로 중화로 들어갔다. 다나카, 오사키, 치바, 구사카 네 명도 숙소에 도착하자 여단 본부로부터 다시 대동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지점의 탐험을 의뢰받았다. 네 명은 또다시 용약(踴躍)하며 그 임무를 맡아 2리 남짓을 나아가 강가의 민가로 가서 얕은 여울의 소재 지점을 찾아서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지점 두 군데를 발견하고 또 전에 다나카가 평양으로 갔을 때 실제로 보고 알게 되었던 지점과 합쳐 모두 세 군데의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지점을 보고했는데 마침내 다음 날 아침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오사키(大崎)의 발열 오사키는 그날 밤부터 발열이 생기고 설사도 해 도저히 군대와 함께 출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구사카와 치바 두 사람은 간호를 위해 남아서 오사키의 빠른 회복을 기다리며 군대보다 늦게 출발하기로 결정하였고, 다나카 혼자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지점의 향도자가 되어 군대와 함께 발진했다. 그런데 우리 군이 중화를 출발해 아직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포성이 은은하게 일어나 피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소리를 들은 오사키는 병을 잊고 일어나 여장을 갖추어 치바, 구사카와 함께 전선을 향해 나아갔다. 대동강 강안의 전투 이것은 성환, 아산 전투에서 패한 적장 섭자성(聶子成)이 대동강 강안의 천강리(千姜里)를 근거로 삼아 10여 개의 보루를 쌓고 우리 군의 진로를 차단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혼성여단의 전진을 알고 포화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일어난 전투였다. 중화와 천강리 사이에 있는 두세 개의 보루에 의지하고 있던 적은 우리의 포격으로 황급히 퇴각했는데, 우리 군은 적이 퇴각하면서 지뢰를 설치한 것을 발견하여 이를 폭파시킨 다음 천강리 근처까지 나아가 군대를 주둔시키고 때때로 포격을 나눌 뿐 자중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다나카의 활약 그다음 날은 병사를 쉬게 하고 다다음 날 총공격을 개시했는데 적은 견고한 보루에 의지해 포화를 쏘는 데 비해 우리는 평탄한 들과 밭을 나아가는 것이어서 전투가 어려웠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군은 단숨에 적의 보루를 탈취하기 위해 분격 돌진하며 매우 격전을 계속했는데 다수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 황혼에 이르러 일시 공격을 중지했다. 이날 다나카 지로는 대동강을 도보로 건너는 향도로서 한 무리의 병사와 함께 강변으로 나아가 4~5척의 작은 배에 분승해 중류로 나갔는데 물살이 급해 생각대로 배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대안에 있는 적병으로부터 일제사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몸을 날려 물속으로 뛰어들어 병사와 함께 배를 끌어 강 위의 작은 섬에 도착해 그곳에서 왕성하게 적에게 사격을 가하였지만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대안에 도달할 수 없었다. 평양 함락의 총성 그날 밤 한밤중부터 평양 방면에서 맹렬한 총성이 일어나 일대 격전이 일어났음을 상상했는데 이것은 함경도 원산에 상륙한 다쓰미(立見) 소장이 이끄는 일개 여단이 평양성의 배후에서 맹공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시킨 격전의 총성이었다. 네 사람, 오시마 여단과 평양으로 들어가다 평양의 함락은 순식간에 천강리를 고수하는 적을 고립에 빠지게 한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이 방면의 적도 그날 밤 안에 보루를 버리고 퇴각하여 오시마(大島) 혼성여단은 적이 버리고 간 배다리[船橋]를 이용해 대동강을 건너 무사히 평양으로 들어갔다. 오사키, 치바, 구사카의 귀환과 1관문(貫文)의 추방 평양으로 들어온 네 명은 며칠 동안 휴양하였는데 오사키는 병이 아직 충분히 치유되지 않았고 또 더 이상 군대와 함께 나아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치바, 구사카와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다나카만 의주까지 종군하기로 하였다. 오사키가 여단 본부 나가오카 가이시 참모 소좌를 방문해 이별의 말을 하자 소좌도 지금까지의 노고에 감사하는 인사를 했다. 그때 일행은 귀환 여비가 결핍되어서 오사키가 다소간 여비를 빌리고 싶다는 내용을 상담하자 소좌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이윽고 부하 병사에게 조선 돈 1관문을 가져오게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군사비여서 제군과 같은 군인 이외의 사람에게 지급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사소하지만 여비에 충당하기 바란다.”라고 말하며 병사가 가져온 1관문의 조선 돈을 내놓았다. 오사키는 이 냉혹한 처사에 대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한결같은 마음은 오직 보국(報國)뿐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노고는 동지들이 단지 군국(君國)에 보답하려는 한결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그들 개인을 위해서도 혹은 무언가 은상(恩賞)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서 이것을 책망하는 것은 도리어 동지의 마음에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 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도중에 조선 돈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우리는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군사비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귀하 개인으로부터도 무언가 받을 이치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나는 건강을 해쳐 돌아가는 것이므로 빌려 가지만 이렇게 많은 것은 곤란하므로 반 정도만 빌려 가겠다.”라며 5백 문(文)만 떼어내 가지고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와 그 일을 동지에게 말하자 나머지 세 명은 매우 분개했다. “군인 이외 자에게는 군사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 나가오카는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인 중화 정찰의 큰 임무를 어째서 군인 이외의 자에게 의뢰한 것이냐. 군인 이외의 자라고 한다면 군사비 속에서 마련한 식량도 지급하면 안 될 터인데 비상식량까지 지급하며 우리를 정찰에 보낸 것 아닌가.” 세 사람의 개탄 “그가 행한 일은 실로 매우 무정하고 냉혹하다. 병후(病後) 피로한 자를 향해 특히 무거운 조선 돈을 주며 여비로 하라는 것도 너무나 동정이 없는 처사이다. 이러한 무정하고 냉혹한 군인이 우리 일본에 속출하게 된다면 지금 청군의 추태를 웃고 있어도 이윽고 우리 군도 또 청군보다도 열등해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지금 사기의 진흥을 꾀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전진은 정말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나가오카 참모의 처사에 끝도 없이 치밀어 개탄하였다. 우치다의 와병(臥病)과 혼마의 내방 여기에서 이야기는 앞으로 돌아간다. 병 때문에 동지와 헤어져 홀로 초연하게 도중에 귀환길에 오른 우치다 료헤이는 길거리 화약제조소의 경비원에게 부탁해 그곳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요청했는데, 다음 날이 되어도 걸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홀로 누워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명의 일본인이 찾아왔다. 누구일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자 이는 동지 혼마 규스케였다. “내가 안성에서 뒤처리를 하고 경성으로 돌아가 보니 제군은 다시 강원도를 향해 출발했다고 듣고 이를 쫓아가기 위해 달려서 이 길을 통과하는데 화약제조소에 일본인이 있다는 것을 듣고 혹시 동지가 아닐까 생각해 찾아온 것인데 그것이 자네였다는 것은 다행이다. 살펴보니 자네는 안색이 좋지 않고 또 부상을 당한 것 같은데 어떠한 일인가. 그리고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라고 혼마는 우치다의 상태를 신경 쓰면서 물었다. 우치다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말한 뒤 “다른 동료들에게는 자네의 튼튼한 다리를 사용하면 아마도 내일은 일행에게 따라붙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했으므로 혼마는 안심하였다. 혼마는 우치다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뒤 길을 서둘러 출발하려고 했는데 우치다가 갖고 있는 칼을 보고 “그것을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라고 소망했다. 우치다는 “자네는 칼을 갖고 오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혼마는 “아니, 갖고 왔는데 어젯밤 조선인에게 도난당해 버렸다.”라고 하여, 우치다는 “그렇지만 목숨을 도난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나는 자네도 알고 있듯이 경천(敬天)에서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용이하게 쳐낼 수 있는 적에게 포로가 되는 방심하는 실수를 했다. 그 이후 무기는 결코 손에서 떠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와 같은 중병에 걸려 적을 만나도 싸울 힘이 없어졌다. 이렇게 되어서는 칼을 갖고 있어도 할복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죽을 때는 적이 죽여 주기 때문에 칼을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자네는 지금부터 적에 맞서 싸울 것이기 때문에 자네에게 주겠다.”라고 말했다. 우치다, 혼마에게 호신(護身)용 칼이 든 지팡이를 주다 그리고 휴대하고 있던 비젠(備前) 오사후네 노리미쓰(長船則光)의 칼이 든 지팡이를 혼마에게 건네며 “이 칼은 한때 적과 싸워 구부러진 것을 밟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칼집이 세워져 있다. 그것을 알고 사용하기 바란다. 갑작스레 뽑는 것은 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혼마는 “고맙다.”라며 그것을 받아들자 나는 듯이 동지의 뒤를 쫓아갔다. 요시쿠라, 병든 우치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가다 우치다는 그다음 날도 허망하게 병든 몸을 안고 그곳에 있었는데 다시 두 명의 일본인이 찾아왔다. 그것은 병 때문에 일행과 헤어져 돌아온 요시쿠라 오세이와 니시와키 에이스케였다. 두 명은 병이라고 하지만 우치다와 같은 중병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길로 경성까지 돌아갈 작정으로 우치다에게 권하기 위해 들른 것이었다. 그들은 우치다가 매우 쇠약해진 것을 보고 다시 놀라면서 약조차 구할 수 없는 이러한 불편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큰일이라며 경성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걸을 수 없다면 배를 빌려 한강을 타고 내려가자고 권했다. 우치다는 그 권유에 따라 간신히 배가 있는 곳까지 가서 배를 빌려 함께 한강을 내려가 덕촌(德村)에 도착했다. 그러나 세 명이 가지고 있는 돈을 합쳐도 뱃삯을 지불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사공을 데리고 경성을 향하는 도중 어느 고개에 이르렀을 때 이곳까지 무리하게 기력을 다해 걸어온 우치다는 마침내 병이 심해져 노상에서 혼절해 버렸다. 우치다, 도중에 혼절 요시쿠라와 니시와키는 매우 놀라 물을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산 위여서 부근에는 한 방울의 물조차 없고 헛되이 막막해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일본 전신대의 기사가 지나가다가 이 모습을 보고 곧바로 휴대한 응급약을 우치다의 입에 넣었기 때문에 우치다는 마침내 소생했다. 이리하여 요시쿠라, 니시와키는 그 기사와 함께 우치다를 도와 마침내 경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쓰쿠다 노부오 집을 방문해 뱃삯을 빌려 데리고 온 사공에게 건네주고 일단 그곳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런데 하루 이틀 정양하는 사이에 경관이 찾아와 자주 우치다 등을 물색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쓰쿠다의 집에 오랫동안 있는 것은 위험하여 우치다와 요시쿠라는 곧바로 세분고라고 하는 민가(閔家)의 별장으로 옮겨 관헌의 눈을 피하면서 정양에 힘썼다. 우치다와 요시쿠라의 정양(靜養) 그러는 사이에 요시쿠라는 점차 원기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는데 두 사람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 전봉준 등 동학당도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천우협과 책응(策應)하여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운봉(雲峯)에서 그 기회를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과 청국이 개전하게 되어 천하의 형세는 일변했던 것이다. 그런데 산속에 있는 그들은 아직 그간의 소식을 알 리도 없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면 어떠한 잘못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우치다는 이 점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루는 요시쿠라를 향해 전봉준을 운봉에서 만나 최근의 상황을 설명하고 동학당으로 하여금 진퇴를 잘못하지 않도록 힘쓰지 않는다면 맹약의 의(義)를 등지게 된다며 함께 운봉으로 갈 것을 권했다. 내지의 동지에게 보고와 전봉준 방문의 분담 요시쿠라도 원래 같은 의견이었는데 우치다의 건강 상태가 도저히 그것을 견딜 것 같지 않았으므로 운봉행은 자신이 맡을 테니 자네는 일본으로 돌아가 내지의 동지에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하고 또 병의 보양에 힘쓰라고 말하며 간절히 우치다의 귀국을 권했다. 따라서 우치다는 동학당에 관한 것을 요시쿠라에게 부탁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경성으로 가서 인천으로 출발했는데 우연히 스즈키 덴간, 오하라 요시타케가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우연히 만남을 기뻐하며 함께 귀국하였다. 세 사람의 해후와 귀국 같은 숙소에서 배편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또다시 도야마와 히라오카의 명을 받아 천우협의 안부를 탐색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미야카와 고로사부로(宮川五郞三郞)를 만나 거듭거듭 해후를 기뻐했다. 미야카와는 우치다 등을 만나 알맞게도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다시 종군기자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전지(戰地)로 향했고 스즈키, 오하라, 우치다 세 명은 나가사키 직항 배편을 타고 내지로 향했다. 그때는 1894년 9월 초순이었다. 나가사키 상륙과 위기일발 나가사키에 돌아온 스즈키 등은 오하토(大波戶) 부근의 기선 숙소에 투숙한 뒤 은밀히 스즈키가 이전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이마쵸(今町) 미도리야(綠屋) 여관의 여주인 및 예기(藝妓) 모(某)에 알리자 두 사람이 찾아와 무사함을 기뻐하고 함께 미치노오(道の尾) 온천으로 갔는데 일찌감치 경관이 그것을 알고 추적해 왔다. 세 사람은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여관의 기지로 겨우 도주하여 서로 흩어져 각지에 숨었다. 애국지사가 보국(報國)의 뜨거운 정성을 발휘해 수많은 고통을 맛보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국법은 냉혹한 손을 뻗어 그를 감옥에 가두려고 했다. 매우 두려워하고 바람 소리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치다는 교묘히 관헌의 추적을 벗어나 고향 후쿠오카로 돌아가 부모를 살핀 뒤 도쿄로 상경해 도야마, 히라오카, 마토노 등에게 조선에서의 천우협의 행동을 보고하고 잠시 간다(神田)의 하숙집에 몸을 숨겼다. 오하라도 역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간 뒤 마침내 홋카이도로 달려갔던 것이다. 요시쿠라의 포박과 무죄판결 요시쿠라 오세이는 우치다와 헤어진 뒤 그 약속을 실행하려고 운봉으로 가는 도중 헌병에게 붙잡혀 부산으로 압송되어 그곳 영사관 감옥에 갇혔다. 영사관보인 야마자 엔지로는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천우협도와 친밀한 교제가 있어 협도의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동정을 보냈다. 그러므로 창원금광산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사건을 들어 협도 무리에게 강도죄를 묻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광산 주인인 마키 겐조 부자를 타일러 그 증언을 피고에게 유리하게 하는 데 진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 요시쿠라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따라서 이것에 관계한 동지도 청천백일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도쿄 방면에서도 동지의 선배, 친구들이 정부 당국에 운동을 하여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권고했기 때문에 억지로 체포하지 않은 것인데 요시쿠라가 무죄선고를 받게 됨에 따라 그들 동지는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전봉준의 포박과 처형 그리고 전봉준은 그 뒤 천우협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우치다, 요시쿠라 등이 걱정하고 있던 대로 마침내 행동을 잘못해 우리 군대와 충돌하였고 부상해 도주하던 중 전라도 고부에서 조선군에게 붙잡혔고 다시 일본군에 인도되어 경성공사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무렵 경성에 있던 다나카 지로는 경찰 측의 양해를 얻어 죄인으로 가장해 전봉준의 감방에 들어가 헤어진 이후의 형세의 변화와 천우협의 행동을 자세히 말하고 또 동지의 행위가 일본의 법률을 위반했기 때문에 관헌의 수사가 엄중해져 요시쿠라가 포박당한 결과 마침내 동학당과의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되었던 전말 등을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일본으로 탈출할 것을 권했는데 전봉준은 협도의 두터운 의리에 감사하고 또 자신이 일본 정부에 대해 오해를 품고 있었던 점 등을 말하고 “내가 여기에 이른 것도 필시 천명이다. 굳이 천명에 대항해 일본으로 탈출할 의지는 없다.”라고 그 각오를 말하고 또 “나는 조만간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나의 사후에는 부디 동학당을 구해 달라.”라고 간원했다. 다나카는 이를 승낙하고 위안을 준 다음 출옥하여 이노우에 공사에게 면회를 요청해 전봉준에게 관대한 처분을 해 주도록 희망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처음에는 동학당을 흉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전봉준이 공사관의 감옥에 수용됨에 이르러 그 인격이 고결하고 식견이 고매한 점이 조선인 가운데 이전에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라며 추중(推重)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으므로 용이하게 다나카의 희망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 뒤 전봉준을 조선 정부에 인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사형에 처해지지 않도록 특별히 희망을 붙여 인도했다. 그런데 조선 정부에서는 이노우에 공사가 일시 귀국한 틈을 타 멋대로 사형에 처한 것은 정말로 애석해야 할 일이었다. 객지에서 병을 얻어 그 감회를 적다 客舍獲病書感 보령산인(保寧山人)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가을빛 제성에 완연하여 秋色集帝城 무수한 나뭇가지 솟아 있네 萬衢氣秀聳 원정 나간 병사 아득히 생각하니 遙憶征戍兒 먼 곳에서 용맹한 무위 떨치고 있겠구나 殊域振神勇 아아, 나는 보잘것없어 噫吾雖無似 기러기 털 무거운 줄 모르나 不知鴻毛重 원정 나간 말발굽 소리 엄숙하니 肅肅征馬聲 장대한 포부가 가슴을 울리네 壯志衝胸湧 나약한 천한 몸을 어찌하겠는가 若何敗賤軀 말고삐 끄는 무리가 두렵다 羈之徒恐恐 베개에 기대어 오포(午砲) 소리 들으며 欹枕聽午砲 명성을 떨칠 수 없음을 나직이 읊조리네 靜言難奮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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