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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南原郡宗理院 남원군종리원
  • 기사명
    「宗理院史附東學史」
  • 이미지
    prd_0166_106 ~ prd_0166_107 ( ~ 쪽) 이미지
  • 날짜
일러두기

革命전후 敎團연혁 상세히 기록
南原출신 지도자들의 인물 略傳

「宗理院史附東學史」

「중리원사 부동학사」는 1926년 南原郡主任 宗理師 崔炳鉉이 갑오년 당시의 남원지역 동학지도자 柳泰洪의 口述을 바탕으로 나마원에서의 東學 沿革을 기록한 책이다。그 내용은 1861년 水雲 崔濟愚의 남원 隱跡菴 修行시기로부터 1926년까지에 걸쳐 있는데、이 책의 후반부에는 「南原郡 東學史」라는 별도의 제목하에 최제우의 은적암 수행부터 동학농민혁명까지의 내용이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그러므로 먼저 「남원군동학사」에서 주목되는 내용을 몇 가지로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운의 은적암 수행〓수운 최제우가 경주에서 布德을 시작한 후 官의 지목이 따르자 이를 피해 남원으로 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그러나 수운이 남원에 온 이후 은적암에 자리잡는 과정에 대해서는 단지 徐公瑞라는 인물의 알선으로 은적암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그런데 「남원군 동학사」는 이 대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1861년 6월에 大神師가 湖南으로 갔는데… 남원군 남문밖 廣寒樓 아래 烏鵲橋 근처의 徐亨七 집에 도착해서 며칠을 머물렀다。그런데 그 집은 약방이어서 번잡하므로 인근에 있는 서형칠의 甥姪 孔昌允 집에 머물며 서형칠·공창윤·梁亨淑·梁局三·徐公瑞·李敬九·梁得三 등에게 전도하였다。…그해 가을에 대신사가 은적암(은적암은 남원군내 서쪽에서 십리쯤에 있는 蚊龍山城 密德庵 안의 대신사가 머물렀던 房의 이름)에 가서 도를 닦으며 겨울을 지내고 (동학)歌詞를 지어 각지의 門徒에게 보내었다。…1862년 봄에 대신사가 은적암에서 경주로 돌아간 후에도 서형칠·양형숙·서공서 등이 龍潭亭에 다니면서 (동학의) 道脈을 통하다가 1864년 봄에 대신사가 참변을 당한 후에 隱伏하였다。」(현대식표기로 고침)고 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원에서의 수운의 행적과 이때로부터 이미 적지 않은 남원의 인물들이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하였던 사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공주집회에서 금구집회까지〓갑오년 직전、1892년에서 1893년 사이 동학교단은 동학을 공인받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大神師伸冤운동을 전개하였다。이 신원운동은 공인받기 위한 동학교단의 운동이며 동시에 이를 명분으로 관에 집단으로 저항했던 민중운동이었다。따라서 농민혁명의 전단계 역사로서 그동안 많은 주목을 받아왔고 동학교단측의 자료에도 그 과정에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집회운동을 주도한 徐仁周등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적이 없었는데、「남원군동학사」는 삼례 집회시 서인주가 집회민을 대표하여 「전라감영의 營將 金始豊과 담판」하는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삼례집회의 경과와 성격、동학지도자 서인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본다。

「남원군동학사」는 또 농민혁명 전단계의 사건으로서 가장 주목받아 왔으나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던 「금구집회」세력의 활동과 해산까지를 소개하고 있다。금구집회 세력의 움직임과 집회의 성격、그리고 농민혁명 직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지역과 전라좌도지역의 상황을 상세히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인 「南原郡 宗理院史 附東學史」와 「殉敎略歷」。

▲고부봉기에서 전봉준의 최후까지〓「남원군동학사」는 고부농민봉기에서부터 전봉준의 최후까지 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농민군이 황룡촌 전투에서 사용했던 장태의 모습이다。「남원군동학사」에 의하면 농민군은 장태 7개를 만들어 사용했는데、장태(竹塒)는 「길이는 21尺이오 높이는 7尺인데、양쪽 머리에 십자형으로 轉輪을 하고 塒안내에 마룻대(棟)를 가로질러 얽어서」 만든 것이었다。

▲남원 「집강소」(倡義事務所)〓전주성에서 정부군과 화약을 맺은 농민군은 전라도내 각군에 흩어져서 이른바 농민군 「집강소」를 설치하는데、이때의 남원「집강소」에 대해「남원군동학사」는 「각 군의 집강소에 執綱의 직임을 두었는데、김개남이 남원군에 와서 五營을 설립하고 49일을 머물면서 營마다 一元將 二元將軍守軍 營軍의 직임을 두고 또 省察 統察 수십인씩을 두었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강소」가 김개남의 남원 경영의 양상을 읽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이 기간에 농민군이 나름의 편제하에 농민군을 편성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농민혁명과 관련해서「남원군동학사」는 이외에도 전봉준의 나주·운봉 담판、김개남과 박봉양의 대립、9월 재봉기에 관한 전봉준과 김개남의 8일간에 걸친 祕密相議 사실、김개남 북상후 남원농민군과 민보군의 전투、전봉준의 최후 모습 등에 대해 적고 있다。

한편 「종리원사부동학사」에는 「남원군동학사」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고、여기에 더하여 농민혁명 직후 남원에서 전개되었던 동학교단의 재건 노력과 재건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특히 맨 끝에는 1908~1926년까지의 남원군종리원 임원의 직책과 명단、남원내 각 면단위종리원 임원의 직책과 명단이 정리되어 있고、이와함께 운봉과 구례교구의 역사와 임원명단도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는데、농민혁명 이후 남원·운봉·구례에서의 동학교단의 활동과 그 인물에 관한 자료는 현재 이것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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