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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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 64호 기억을 잇는 사람들
기록이 증명한 명예, 선조의 뜻을 잇는 후손의 자부심

기록이 증명한 명예, 선조의 뜻을 잇는 후손의 자부심

유돈생,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시헌의 증손자



날짜 2026. 4. 24.(금)

장소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참여자 유시헌(1843~1904)

유족 유돈생(유시헌의 증손자)

대담 기획운영부 임현진



유돈생,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시헌의 증손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시헌 선생은 19세기 후반 강원도 정선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지도자로, 1871년 무렵 동학에 입도한 뒤 해월 최시형 선생과 인연을 맺고 강원도 교세 확산에 힘쓴 인물로 알려졌다. 특히, 최시형 선생에게 정선의 무은담 자택을 은거지로 제공하며 교단 재건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후 강원도 평의장과 도접주를 맡아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세력을 이끌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족들 또한 혹독한 탄압과 고초를 겪었으며, 그 과정은 장남 유택하 선생이 남긴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유시헌 선생의 증손자 유돈생 님을 만나, 집안에 전해 내려온 기록과 기억, 그리고 유족으로서의 소회를 들었다.



1.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분들께 소개와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신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의 증손자 유돈생이라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이름이 『녹두꽃』이지요. 그간 우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세상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여러 선생님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에 그늘에 있던 녹두꽃이 활짝 피어나 전국적으로 그 향기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아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동학농민군의 명복을 빌며, 이제는 그분들께서 영원한 안식 속에서 고이 잠드시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희 후손들이 이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분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먼 곳까지 저를 찾아와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2. 집안 어르신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또한, 집안에서 현재 참여자로 공식 인정되신 분들은 모두 몇 분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희 집안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기록물 덕분이었습니다. 유시헌 증조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소장하고 계셨던 『최선생문집 도원기서』라는 책자가 있었는데, 이 귀한 자료가 집안에서 대를 이어 전해 내려왔습니다. 저는 이 책을 직접 보고 공부하며 우리 선조들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택하 할아버님께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신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라는 책을 직접 쓰셨는데, 그 기록 속에 담긴 고초와 행적을 통해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집안에서 현재 참여자로 인정되신 분은 유시헌(본명 유인상) 증조할아버님, 최시화 증조할머님, 유택하 할아버님, 그리고 유택학 둘째 할아버님까지 모두 네 분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택하(유시헌의 장남) 초상화



3. ‘시헌’이라는 성함에도 동학의 의미가 깊게 담겨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에게 정선의 ‘무은담’ 자택을 은거지로 제공하며 교단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셨는데, 유시헌 선생님과 강원도 동학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유시헌 증조할아버님께서는 1871년 무렵 동학에 입도하신 후, 영월의 박용걸 선생님과 인연을 맺으며 해월 최시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어 1872년경 최시형 선생님을 무은담 자택으로 모셔 왔습니다. 당시 무은담은 이름 그대로 안개가 깊고 산속 깊숙이 위치해 있어 관군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은신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식량을 정성껏 제공하고 49일 기도를 올리며 동학의 여러 의례와 수행 질서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고 전해집니다.


  또 그곳을 기반으로 포교 활동을 펼치면서 비로소 정선 지역에 동학의 교세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지요. 당시 교인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중에서도 핵심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최시형 선생님과 뜻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시(時)’ 혹은 ‘활(活)’자로 개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저희 증조할아버님도 본명은 ‘유인상’이나 이때 ‘유시헌’으로 바꾸셨습니다. 이후 증조할아버님께서는 강원도 평의장이자 도접주라는 중책을 맡으시며 도내의 수많은 동학 지도자 및 인사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혁명의 중심에 서 계셨습니다.



4.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시헌 선생님과 그 가족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기록을 바탕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정선읍으로 모여든 동학농민군은 무려 3,000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동비토론(東匪討論)』에 따르면, 당시 강릉부사였던 이회원은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을 정선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인 ‘비괴’로 지목하면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겪은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최시화 증조할머님은 1894년 11월 평창에서 잡혀 모진 옥고를 치르며 석방과 재투옥을 반복하셨습니다. 당시 겨우 13살이었던 유택구 넷째 할아버님은 현상금을 노린 밀고로 인해 평창 옥에 갇히셨습니다. 최시화 증조할머님께서는 석방된 후 몇 달간 그 어린 아들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하며 유택구 넷째 할아버님을 보살폈습니다.


  가장 비통한 일은 유택학 둘째 할아버님의 죽음입니다. 1894년 11월 영월 옥에 수감되셨는데, 관군의 모진 고문 앞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도접주였던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의 거취를 대라는 취조에 유택학 둘째 할아버님께서는 “내 아버지는 하늘이니 하늘에서 찾아라”라며 당당히 맞서셨습니다. 이에 분노한 무리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온 집안이 쫓기던 중이라 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유택하 할아버님 또한 쇠사슬에 묶인 채 동료들의 행방을 대라며 사방으로 끌려다니시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셨습니다. 유택은 셋째 할아버님도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은 1896년 검거되어 평창 옥에 수감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저희 집안에서 내려오는 기록물인 『동학난중기』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5.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에 의하면 유시헌 선생님이 평창 옥에 투옥되셨을 때, 제자들과 도인들이 자발적으로 석방 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당시 지역사회에서 선생님에 대한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이와 관련해 전해 들으신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유시헌 증조할아버님께서는 강원도 도접주이자 평의장으로서 종교적 위상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내에서도 덕망을 갖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집안 어른들께 듣기로는 당시 정선 지역 정서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시헌 증조할아버님께서 옥에 갇히시자, 그분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과 도인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상소문을 올리며 조직적인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개 개인을 위해 지역사회의 일원이 이토록 힘을 모으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 간절한 노력 덕분에 결국 15일 만에 옥에서 풀려나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동학난중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 유시헌 선생님의 배우자이신 최시화 선생님이 투옥될 당시 가산을 모두 빼앗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로 인해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관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무려 10여 년 이상을 도피 생활로 보냈으니, 집안에 살림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지요.


  옥에서 겨우 몸을 빼내 나오셨을 때도 돌아갈 집조차 없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정선의 수령마을이라는 곳에 빈 농막이 하나 생겼습니다. 당장 돈이 없어 여기저기서 어렵사리 돈을 빌려 그 집을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입에 풀칠하며 살아갈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온 가족이 옥고를 치러야 했으니 그 고통의 무게는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유시헌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유택하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동학난중기』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뜻깊은 기록입니다.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나, 후손으로서 이 기록이 가지는 의미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책 속에 담긴 여러 일화 중에서도 제 가슴에 가장 깊이 남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유시헌 증조할아버님께서 피난을 다니시던 중 경주의 어느 한 주막에 머무르게 되셨을 때의 일입니다. 정체를 숨기려고 “강릉에서 내려온 유 씨”라고만 소개하셨는데, 주막 아주머니 한 분이 단번에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을 알아보시고는 “정선의 유접(유시헌 접주) 아니십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의 존함이 멀리 경주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지요. 잠시 후 주막에 나졸 열 몇 명이 들이닥쳤는데, 그들도 외려 “정선 유접 어르신이니 고이 모셔라”라고 하며 예우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후손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동학난중기』는 1887년부터 1897년까지의 동학농민혁명 전후 상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특히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을 비롯한 일가족이 관아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경상북도와 강원도 지역을 전전하며 겪은 고난의 세월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난처가 되었던 동학교도들의 이름과 거주지도 기록에 남아 있어 당시 동학의 인적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데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희 후손에게 가장 뜻깊은 점은 이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었기에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을 비롯한 집안 어르신들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입증하고 유족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원래 이 기록은 표지도, 제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정성을 담아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라는 글자를 써서 표지로 삼았습니다.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



8. 유시헌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집안에서 중시하는 가치나 실천해오신 활동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 이런저런 사업에 도전했다가 돈도 많이 잃어보고 숱한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지요. 그런 부침 속에서도 제가 놓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30대에 마을 이장을 맡아 면사무소에 드나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 수십 명 중 지역 출신은 고작 두세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다 도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지역 아이들은 한문이나 조금 배울 뿐, 고등학교 진학은커녕 중등 교육조차 꿈꾸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마을에 대학 졸업자는 거의 없고 고졸자도 열 명 남짓이었지요. 여유가 없어 공부를 못 시키는 게 참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무료 교육을 열고자 이곳저곳에 지원 요청도 하고 수업을 해 주실 선생님들도 모셔 왔습니다. 그런데 학생 수가 3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지원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뜻있는 지역 인사인 안영배 님을 찾아가 이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이 학교가 정선 지역의 유일한 사립학교인 문곡중학교의 전신입니다.


  또한, 옥사하신 유택학 둘째 할아버님을 평생 모시며 절개를 지키신 정학렬 할머님을 기리기 위해 ‘효행공원’을 만들고, 유시헌 증조할아버님의 일생을 기록한 ‘행적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안이 중시하는 효의 가치와 할아버님의 희생을 잊지 않으려 했던 저 나름의 실천이었습니다.



9. 유족 등록을 신청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준비 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웠거나 기억에 남는 점이 있으셨나요?


  사실 저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정기적으로 유족 신청을 접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조사위원으로 계시는 김춘성 선생님과 귀한 인연이 닿았습니다. 김춘성 선생님은 정선 출신으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역사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김춘성 선생님께서는 “정선 지역의 참여자와 유족들을 제대로 발굴해서 역사에 등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조사하셨고 그 과정에서 저희 집안을 찾아내셨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안에는 『동학난중기』처럼 명확하고 생생한 당대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수월하게 유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10. 유족으로 인정되었을 때의 감회는 어떠셨나요? 집안 가족분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사가 시작되고 등록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저희에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놀라움도 아주 컸습니다. 무엇보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우리 조상님들의 존함이 국가의 공식 명단에 게재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작년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방문했을 때 추모관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분들의 명패가 경건하게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작년에 등록이 되었으니, 아마 이제는 저희 할아버님들의 명패도 그곳에 자랑스럽게 모셔져 있겠지요. 후손으로서는 그 광경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국가에 어떻게 이 고마움을 보답해야 할지 그런 마음뿐입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추모관에 모셔진 유도원(유시헌의 자), 유택하, 유택학, 최시화 참여자 명패



11.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혹은 정부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손으로서 드릴 말씀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뿐입니다. 저희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그 혹독한 시절에 큰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신 숭고한 참여자분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후손들도 조상님들이 남기신 그 고귀한 뜻을 잊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뜻을 올바르게 이어가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돈생 선생님, 오늘 집안 어르신들의 귀한 발자취와 가슴 뭉클한 가족사를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유족 인터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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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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